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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 (일)

[양해원의 말글 탐험] [123] 정말 食怯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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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양해원 글지기 대표


자려고 눕는데 벽에서 뭣이 움직였다. 웬 놈이냐 불 켜보니 ‘돈벌레’ 아닌가. 전기채 충격에 떨어져 침대 밑으로 줄행랑친다. 살충제 못 이기고 기어 나온 이놈 호적명이 ‘그리마’던가. ‘그리맛과의 절지동물.’ 그리맛과(科) 하고 사이시옷 쓰는 걸 보니 순우리말이었구나. 반갑긴 하다만 오밤중에 식겁하지 않았느냐. 가만, ‘식겁’은 어디 출신이더라?

경상도 말 '시껍(끕)하다' 때문에 더러 비표준어로 여기는 이 말, '食怯'으로 쓰는 한자어라는데. 말 그대로 '겁을 먹음'이다. 한데 수상타. 타동사 '먹을 식(食)'에 목적어가 따르는 낱말 구성은 엔간해선 찾기 어렵다. 고작해야 '식육(食肉)' '식충(食蟲)'인데 그나마도 추상명사는 오지 않는다. 마음·감정을 품거나, 뭘 받아 챙긴다는 뜻의 '먹다'는 대개 食으로 안 쓰는 것이다. '마음을 먹다'를 '식심(食心)' 아닌 '작심(作心)', '뇌물을 먹다'도 '식뢰(食賂)' 아닌 '수뢰(受賂)' 하듯이.

'겁'이 목적어인 낱말 또한 드물다. 잘해야 '끽겁(喫怯·잔뜩 겁을 먹음)' 정도. '파겁(破怯)'은 비슷한 조어지만 '두려움이나 부끄러움이 없어짐'으로, '깰 파(破)'가 타동사 노릇을 하지 않는다.

더 이상한 것은 '식겁'이 1990년대 이후 펴낸 사전에나 있다는 점이다. 90년 이전 조선일보 기사 중 뚜렷하기로는 김정한 소설 '옥심이'(1936) '岐路'(기로·1938)에 한 번씩 나오는 게 전부다. 동아일보도 이태원 장편 '客舍'(객사·1972)에만 몇 차례 나온다. 두 작가 모두 영남(동래, 대구) 출신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食怯은 혹시 민간어원(民間語源) 아닐까. 순우리말 '우레'가 '雨雷'(우뢰)에서 왔다고 잘못 유추한 것처럼. '행주치마'가 임진왜란 때 거둔 행주(幸州)대첩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마찬가지다.

살겠다고 집에 들어온 그리마는 살지 못했다. 그 짧은 목숨 재촉한 장맛비가 아직도 덜 왔다는데. 사람도 벌레도 식겁하는 비, 그만 좀 내리소서.

[양해원 글지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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