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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4 (금)

악한 저희를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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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사람들: 중일전쟁 전범들을 인터뷰하다

제임스 도즈 지음, 변진경 옮김/오월의봄·1만9000원

전시 강간, 대량학살, 생체실험, 영아살해…

전범 증언 속 ‘악의 실체’ 탐구

인권활동과 선악 구분이 놓인 곤경 드러내고

‘이야기하기의 윤리’를 질문


한겨레

중일전쟁 당시 한 일본군이 일본도로 사람의 목을 내리치고 있다. 긴 칼이 없던 부하들도 이를 흉내내면서 잔혹한 짓을 일삼았다고 한다. 출처 위키피디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몹시 난폭하고 불쾌한 이야기가 될 테니까. 선정적인 호기심을 누르고,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총에 맞아 죽은) 여자의 팔 밑에서 작은 아기가 빠져나왔어요. (…) 여자의 가슴을 찾아 만지고 있었죠. 그러다가 내 얼굴을 보더니 아기가 미소를 지었어요. 그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죠. (…) 그건 내가 전쟁에서 저지른 행동 중 처음으로 가장 큰 역겨움을 준 것이었어요. (…) 지금 서둘러 말하지 않으면-내가 죽어버리면, 이 이야기를 말해줄 사람이 없을 거예요.”

“강간을 한 후에 여자를 죽이지는 않았어요. 그래요. 때로는 죽였어요-하지만 여자가 저항한 때였어요. 군인들 셋, 다섯, 여섯이 같이 여자를 끌고 가서 (…) 그런 일이 일어났어요.”

“결국 선생님이 물어보았던 것처럼 쾌락이 되는 거예요. (…) 사람들을 집에 가둔 채 불을 지르고 불타는 걸 지켜보는 거죠.”

한겨레

말줄임표 속에는 훨씬 잔혹한 상황과 표현들이 등장한다. 위의 이야기는 중일전쟁 패전 뒤 중국 푸순전범관리소에 수용되었던 일본 전범들의 증언이다. 이들은 중국과 조선의 항일운동가들, 그리고 민간인을 붙잡아 죽이고 생체실험했으며 여자들을 강간하고 어린아이까지 무참히 살해했다. 러시아 시베리아 수용소에 갇혀 힘든 시간을 보낸 이들은 중국 푸순에서 뜻밖의 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며 뼈아픈 참회의 시간을 갖게 된다. 석방된 전범들은 일본으로 돌아가 1957년 중국귀환자연락회(중귀련)를 결성한다. 귀국 뒤 오히려 중국 공산당에 세뇌되었다는 손가락질과 감시에 시달렸지만 수기, 회고록, 간행물 등을 발간하며 죽는 날까지 자신들의 범죄를 생생하게 증언했다. 이들의 변화를 ‘푸순의 기적’이라 말한다.

한겨레

1956년 선양특별군사법정 피고석에 선 전 일본군 사단장들. 재판을 받고 일본에 돌아간 전범들은 반전주의를 주장하며 활동했고 평화주의 전도사 같은 삶에 헌신했다. 그들의 변화를 ‘푸순의 기적’이라 말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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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사람들>은 제임스 도즈 미국 매켈러스터대 영문학과 교수가 일본에서 중귀련 회원들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했다. 전범들의 진술과 전쟁범죄에 대한 현재적 인식 그리고 지은이의 인권운동 차원의 고민이 병렬 구조로 배치돼 얽히고설킨다. 인터뷰이들은 대략 80대 근방의 노인. 지은이는 이들에게 대량학살, 고문, 강간, 영아살해, 생체실험 등 잔혹한 범죄행위의 경험과 느낌이 어땠냐고 예의바르지만 끈질기게 묻는다. “처음 강간했을 때 어떠셨어요?” “어떤 기분이 드셨나요?” “이제 자신이 과거에 한 일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나요?”

이 책은 농부, 의사, 교사였던 평범한 이들이 어떻게 악의 화신이 되었는지, 그 뒤 어떻게 사죄하며 스스로를 고발하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화해와 용서를 향한 전범들의 감동적인 여정이 아니라, 그들의 복잡하고 미묘한 심리적 패턴을 그려 전쟁의 부수적 효과를 웅변한다. 전쟁 뒤에 따라오는 더 복잡하고 어려운 윤리적 질문을 드러내려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권운동이 고통에 개입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하는 ‘폭로’에 곤경이 존재한다는 점을 이 책은 보여준다. 전쟁서사를 들어야 하는 피로감이 있거니와, 가해자에게 스피커를 주는 것은 그와 친분을 맺는 일이며 그에게 오히려 도움이 될 수도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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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제임스 도즈 미국 매캘러스터대학 영문학과 교수. 문학과 인권을 가르치는 사람답게 전쟁폭력과 윤리적 곤경을 설명하는 데 상당한 공을 기울인다. 오월의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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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통해 폭력, 트라우마, 참회, 재현, 고백, 사과, 치유, 용서를 둘러싼 수많은 아이러니를 보여주려는 것이 책의 목적이다. 지은이는 악을 둘러싼 역설들을 마구 들춘다. 가해자를 악마화하거나 맹목적으로 타협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어떤 사안에서 눈을 감는 일이 된다고 그는 말한다. 전범들은 사죄하려 하지만 그들의 증언은 불가피하게 생존자들에게 상처를 입힌다. 사람들은 생존자에게 치유가 되는 말을 건네고 싶어하지만, 때론 ‘피해자’에 가두고도 싶어한다. 범죄의 잔혹함에 견주면 때늦은 사과는 너무도 공허한데 면죄부를 얻기도 한다. 게다가 전쟁범죄에 대한 증거를 수집하다보면 참과 거짓을 분간할 수 없는, 특정한 윤리나 기준이 통제할 수 없는 결과가 촉발되곤 한다.

이 책은 명확하게 체계화된 역사서도, 철학서도, 문학 에세이도 아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포함한다. 책에서는 수많은 질문이 떠오른다. 학살의 명령자가 누구인가? 명령을 따른 군인들의 죄는 어디까지인가? 정상적인 사람이 괴물이 되어가는 경험은 어떤 걸까? 그들은 왜 자살하지 않았나? 괴물 대다수가 남성이라는 점을 볼 때, 전쟁에서 ‘젠더’는 어떤 구실을 할까? 전시 강간은 필연적인가? ‘악한 사람들’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지은이는 가해자의 개인적 성격보다 “조직 정체성, 사회적 상황, 국가 이데올로기” “사회적 지배욕구, 출세주의, 명령 복종, 권위 복종, 이데올로기적 주입과 순종” 등이 대량학살과 더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일깨운다. “당신은 당신이 누구인가보다는 어디에 있는가로 규정된다.”

한국 독자들의 관심사인 ‘위안부’ 문제도 책에 여러번 등장한다. 전쟁 당시 위안소를 찾았다는 중귀련 회원들 가운데는 돈을 주었으니 성폭행이 아니라고 답한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자신의 생각을 죽을 때까지 계속 수정해가는 이도 있었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의 분석을 보면, 전시 강간은 “특정한 군사적,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작동”한다. ”전시 강간의 피해생존자는 그 국민에게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지은이의 물음은 다분히 현재적이다.

미국인 연구자의 위치는 읽는 내내 아쉽다. 통역사를 사이에 둔 채 끝내 번역되지 않은 이야기는 마지막장까지 미끄러진다. 피해자는 말이 없고, 전쟁 동안 신과 같은 권력을 가졌던 이의 말만 듣는 것도 불편하다. 지은이도 솔직히 한계가 컸다며 털어놓는다. 그럼에도 인터뷰를 계속했던 건, 고백은 개인과 사회를 치유하고 사회적 현실을 재구축하며 역사의 날조와 맞서 싸우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난징대학살, 일본군 ‘위안부’, 강제징용, 세균전 실험 등 전쟁범죄를 눈감는 수정주의 역사관에 대처하는 기본 자세는 끝까지 말을 듣고, 기록하고, 생각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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