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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9 (목)

이슈 항공사들의 엇갈리는 희비

“이스타항공 해고통지서 들고 고향 어떻게 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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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조정 후 추석 맞는 직원들

항공기 정비사 A씨(30대)는 올 추석 충남 고향집에 가지 않는다. 코로나 확산 방지를 위해 이동을 자제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A씨 사정은 다르다. 그는 이스타항공 직원이었다. 이달 초 해고 통보를 받았다. 고향에서 그가 해고됐다는 건 부모님만 안다. A씨는 “친척 어르신들이 ‘너희 회사 어떻게 됐니?’ ‘너는 해고되지 않고 살아남았니?’ 물어볼 게 뻔한데 도저히 내려갈 엄두가 안 난다”고 했다. 그동안 매달 50만원씩 꼬박꼬박 부모님 용돈을 챙겨 드렸던 A씨는 “예순 넘으신 부모님께 돈을 빌리는 처지가 됐다”며 “내 잘못이 아닌데도 내 잘못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부모님 뵐 면목이 없다”고 했다. 그는 “누군가 만나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면 미칠 것 같고, 술을 마시지 않으면 새벽 4시까지 잠들지 못한다”고 했다.

조선일보

이스타항공 대량 정리 해고 및 체불 임금 논란에 휩싸인 창업주 이상직 의원이 28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문체부 전체 회의에 참석해 다른 의원 발언을 듣고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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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타항공은 지난 7일 경영 악화로 전체 직원 1136명 중 605명을 정리해고했다. 본지가 만난 여러 해고자는 대부분 귀성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에게 올 추석은 ‘보름달 같은 한가위’가 아니었다.

6년 경력의 40대 기장 B씨도 “고향에 내려갈 계획이 없다”고 했다. 그도 이스타항공 해직자이다. B씨의 유치원생 딸, 아들은 아직 아빠의 해고 사실을 모른다. 그는 “애들에게는 ‘코로나 때문에 안 가는 것’이라고 둘러댔다”고 했다. B씨는 명절에 부모님을 찾아뵙고 함께 보낸 적이 많지 않다. 작년 추석도 태국 방콕에서 보냈다. 추석이 성수기인 항공업계 특성상 쉬지 못하고 비행기를 몰았다. 부모님은 일주일이 지나서야 찾아뵀다. 그는 “이번 추석엔 여유가 있으니 애들은 놔두고 혼자서라도 다녀올까 고민했지만 결국 포기했다”고 말했다. 회사가 어떻게 됐는지 묻는 말이 쏟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친척들이 위로와 덕담을 쏟아내겠지만 그걸 듣는다고 위로가 되겠느냐. 처녀·총각들이 ‘언제 결혼하느냐’는 질문 듣기 싫어서 집에 안 내려간다는 말이 이제야 이해된다”고 했다.

이스타항공에서 5년간 근무한 승무원 김모(28)씨는 고향을 찾는다. 김씨는 “친척들 만나면 불편하긴 하겠지만 내가 죄지은 건 아니지 않으냐”며 “해고됐다는 이유로 숨어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런 김씨도 지난 설날 가족끼리 주고받았던 이야기를 떠올리면 마음이 착잡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가족들에게 “회사가 곧 정상화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30대 정비사 이모씨는 해고를 피했다. 정리해고자 명단에 들어 있지는 않았다. 추석 때 평소처럼 시골집도 찾을 예정이다. 그렇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고 했다. “상황을 아는 아버지가 더는 회사를 주제로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신다”고 했다. 이씨도 회사에 계속 다닐 수 있을 것이라는 큰 기대를 갖고 있지 않다. 제3의 이스타항공 인수자가 나올 가능성이 없을 것 같아서다. 이씨는 “다른 분야 일자리를 찾아볼 것”이라고 했다.

살아남은 이스타항공 직원들 사이에선 “차라리 잘리는 게 낫다”는 자조 섞인 말도 나왔다. 그들은 지난 2월 임금의 40%를 받았고, 3월부터는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있다. 해고 통지를 받은 이들은 10월 14일 자로 공식 해고 절차를 밟으면 퇴직금 명목으로 최소 몇백만원이라도 손에 쥘 수 있다. 한 해직자는 “퇴직금이 들어오면 8개월 만에 통장에 ‘출금’ 대신 ‘입금’이 찍히는 셈”이라고 했다.

이스타항공을 창업해 실질적으로 지배해온 이상직 의원에 대한 분노를 드러낸 이도 많았다. 이 의원은 이번 사태로 여론이 악화하자 지난 24일 더불어민주당에서 탈당했다. 해고자들은 이 의원의 탈당에 대해 “민심 달래기용이었을 뿐”이라고 했다. 정비사 이씨는 “직원들 피눈물 흘리게 한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한다”며 “탈당을 하든 안 하든 잘못이라도 인정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씨는 “누군가는 끝까지 쫓아가서 (이 의원을) 벌해줬으면 하는 마음마저 든다”고 했다.

[황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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