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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9 (월)

[카페 2030] 미필 여기자의 ‘D.P.’ 감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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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고등학교 남자 동창이 입대 몇 달 만에 탈영했단 소식을 들었다. 순둥이 같은 외모에 성적도 좋은 우등생이었다. 소식을 알려준 친구도 “그럴 애가 아닌데”라며 의아해했다. 넷플릭스 드라마 ‘디피(D.P.)’를 보면서 그 친구가 다시 떠올랐다.

조선일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D.P.'의 한 장면./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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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어디를 가나 ‘디피’ 이야기다. ‘디피’는 탈영병 잡는 군인, 헌병대 군무 이탈 체포조(Deserter Pursuit)가 주인공인 드라마다. 군내 폭행과 성추행, 각종 부조리를 실감나게 묘사해 드라마를 본 군필자들이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까지 호소하고 있다. 국방부는 “휴대전화 사용 등으로 악성 사고가 은폐될 수 없는 병영 환경으로 바뀌고 있다”며 반박 입장까지 내놓았다.

미필 여성인 기자가 ‘디피’를 보고 처음 든 생각은 “진짜 저래?”였다. 군내 사건·사고 뉴스를 접할 때마다 경악하긴 했지만, 탈영병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기자가 “진짜 저 정도였어?”라고 물으면 군필인 지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저 정도까진 아니었지만…”으로 입을 연다. 구타를 당하거나 부조리를 목격한 경험, 최악의 선임 이야기 같은 경험담을 술술 풀어놓는다. 다들 한두번쯤 비슷한 일을 겪어봤기에 드라마가 이렇게 화제가 되는구나 싶었다.

여성이 겪는 차별을 이야기할 때 병역 문제를 꺼내는 남성의 마음도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 병영 문화 개선이 최우선이겠지만, 20대 남성만 이 혹독한 과정을 견디고 희생하라는 것도 불합리해 보인다. 여성도 어떤 형태로든 병역 의무를 져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이렇게 얘기하면 군필 친구들은 “여자가 군대 가도 할 일이 별로 없다”거나 “군 막사나 화장실 같은 시설을 바꾸려면 엄청난 예산이 들 것”이라며 고개를 젓는다. 그러다 “그래도 군대 많이 좋아지긴 했지”라며 화제를 돌린다.

시간을 몇 년 전으로 돌려보자.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개봉했을 때 “쌍팔년도 이야기” “62년생 김지영이면 몰라도 82년생이 무슨 차별을 받았느냐”는 비난이 있었다. 영화를 보고 많은 여성이 ‘PTSD’를 호소했지만 “진짜 저래?”라고 묻는 사람은 드물었다. 누군가 물어봤다면 기다렸다는 듯 “저 정도는 아니지만…”으로 시작해 얘기를 꺼낼 준비가 돼 있었다. 90년대생인데도 “여자는 공부 잘해봤자 필요 없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거나, “회사 입장에선 여자 뽑으면 손해”라는 차별적 발언을 들은 경험을 털어놓다가 “그래도 세상이 나아지고 있지”라고 위안하며 넘어갔을 것이다.

여자도 힘들다고 맞서려는 게 아니다. 공감의 자세에 대한 이야기다. ‘디피’를 보고 나서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자세에 관해 생각하게 됐다. 드라마나 영화가 폭발적 공감을 일으키는 건 저마다 겪은 비슷한 경험을 털어놓게 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인정하는 데서 진정한 공감은 시작된다. 누군가의 고통에 “말도 안 돼!”라고 코웃음 치기보단 “진짜 저래?”라고 물어봤으면 한다. 그동안 몰랐던 이야기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

[백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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