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는 1994년 부다페스트 양해각서 체결 당시 핵무기를 포기함으로써 국제 안보 강화에 크게 기여했다. 상호주의 원칙에 의거해 (미국·영국 등 파트너들도)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을 위해 그만큼의 커다란 기여를 하기를 기대한다.”
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교장관이 22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과 회담한 뒤 열린 공동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그는 “부다페스트 양해각서 서명국들은 우크라이나를 보호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취할 행동에 합의해야 한다”며 “서명국이었던 러시아가 모든 국제 합의와 문서를 위반했다고 해서 나머지 국가들이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책무가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며 이같이 말했다.
우크라이나에서 전쟁 위기가 고조되자 우크라이나 정부는 재차 ‘부다페스트 양해각서’ 이행을 촉구하고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의 두 공화국 독립을 승인하고 이 지역에 대한 자국 병력 진입을 명령하자 부다페스트 양해각서 6조에 따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1994년 12월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미국, 영국과 함께 ‘핵무기 포기’와 ‘영토·주권 보존, 정치적 독립’을 맞교환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부다페스트 양해각서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옛 소련 해체 당시 핵탄두 1700여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170여기, 전략핵폭격기 40대를 물려받은 세계 3위의 핵 전력 국가 우크라이나는 1996년까지 모든 핵무기를 러시아로 이전해야 했다.
부다페스트 양해각서 체결은 우크라이나의 핵 보유에 부담을 느낀 미·러의 이해관계, 옛 소련의 세력권에서 벗어나 경제발전을 모색하기 위한 우크라이나의 결단이 맞물린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소련 부활’을 공공연히 꿈꾸는 푸틴 대통령의 러시아와 맞대어 살아가는 우크라이나에게는 이 양해각서 이행이 중대한 안보 딜레마를 초래했다. 이미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강제 병합으로 이 각서는 사실상 ‘휴지조각’이 되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근본적인 문제는 부다페스트 양해각서가 법적 구속력을 지니는 조약이 아니라는 점이다. 각서에 따르면 서명국들은 우크라이나 주권과 독립을 존중하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력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하지만 러시아의 침공 등 유사시 우크라이나에 대한 방위 공약은 명확하게 규정돼 있지 않다. 미국과 조약에 따른 동맹 관계인 한국, 일본, 호주 등과 우크라이나의 처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쿨레바 장관도 이날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는 집단방위조약은 아니다” “우크라이나는 안보 공백에 놓여있다”며 한계를 인정했다.
안전보장을 약속받고 자발적으로 핵을 내려놓은 우크라이나가 당면한 안보 위기는 서방과 핵협상을 진행중인 이란과 미국 대 중국·러시아 간 지정학적 경쟁의 최전선에 놓인 한반도 정세에도 미묘한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특히 비핵화 조치의 대가로 체제 안전보장·제재완화을 요구해온 북한이 우크라이나 사태 전개 추이를 주시하며 전략적 판단을 내놓을 지 주목된다. 북한은 올초부터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포함해 연달아 미사일을 쏘아올리며 핵실험·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유예 조치 파기까지 시사한 상태다.
박병광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지난달 발간한 보고서에서 현 우크라이나 위기와 관련해 “북한은 핵을 포기한 뒤 결국 무너지고 만 리비아 카다피 정권과 이라크 후세인 정권의 몰락을 봤다”며 “이제 우크라이나의 고초를 보면서 절대 핵을 포기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더 굳혀 갈 수 있다”고 전망했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오른쪽)이 22일(현지시간) 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교장관과 회담 후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A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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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진 기자 yj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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