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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트럼프 “수갑 채워 데려가라”... 다시 두쪽 나는 美, 경찰은 비상대기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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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추문 입막음’ 관련 전격 기소

전·현 대통령 기소, 美건국 후 처음

트럼프 “정치 박해” 지지층 선동

조선일보

지난 2020년 미 대선 직후 백악관 행사에 나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2016년 대선 당시 성추문 입막음 돈을 지급한 것과 관련한 혐의로 약 7년만에 맨해튼 대배심에 의해 형사기소됐다. /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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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30일(현지 시각) 뉴욕에서 형사 범죄로 기소되면서 미 정치의 역사가 다시 쓰이게 됐다. 미 정부 수립 이래 약 230년간 대통령이 45명 나왔지만 현직은 물론 전직 대통령이 기소된 경우는 처음이다. 정치 보복의 악순환 대신 협상과 타협으로 갈등을 풀어가던 미 정치의 관행이 무너지면서 안 그래도 극단적 분열로 치닫고 있는 미국이 더 쪼개질 위기에 처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트럼프는 오는 4일 체포된 상태로 법정에 출두해 기소 사실 인정 절차를 밟을 예정이다. 뉴욕 맨해튼 법원에 소집된 대배심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2016년 성인물 여배우에게 성추문 입막음을 위한 돈을 지급했다는 의혹과 관련, 트럼프에 대한 기소를 과반 찬성으로 의결했다.

조선일보

"트럼프는 언제나 거짓말" -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기소된 지난달 30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 형사법원 건물 인근 공원에 반(反)트럼프 시위대가 설치한 ‘트럼프는 언제나 거짓말을 한다’라고 적힌 현수막이 펼쳐져 있다. 이 법원에서 대배심은 트럼프의 기소를 의결했다. 구체적 혐의 내용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미국에서 전·현직 대통령이 형사 기소된 것은 정부 수립 이래 230년 만이다. 이번 기소는 2024년 대선의 초대형 변수로 떠오를 전망이다. /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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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스(NYT) 등 미 언론은 이번 트럼프 기소가 미국 정치의 오랜 금기를 깬 극적인 사건이라고 전하고 있다. 미국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법 처리를 민주주의와 양당제 협치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정치 보복으로 간주해 자제해왔다. 이런 암묵적 합의가 이번 사건으로 깨지면서 여전히 보수 진영에 두꺼운 지지층을 가진 트럼프가 내년 대선을 앞두고 지지층을 부추겨 조 바이든 대통령과의 극단적 대립 상황으로 몰아갈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아울러 공화당이 지방 검찰 권력을 이용해 바이든 대통령을 각종 형사 기소로 역공할지 모른다는 가능성도 거론된다.

이미 트럼프 정권 내내 분열을 경험한 미국은 다시 두 쪽으로 갈라지고 있다. 트럼프는 최근 수사를 지휘하는 앨빈 브래그 맨해튼 지검장을 “인종주의자” “짐승”이라고 공격해왔다. 앨빈 지검장이 흑인이라는 점을 겨냥한 비하 발언이다. 지난달 18일엔 “내가 곧 체포될 것이다. 시위하라”고 지지자들을 선동하기도 했다. 공화당은 일단 트럼프 편에 서고 있다.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는 30일 “검찰이 정치적 의제를 진전시켜 사법 체계를 무기화하는 것은 법치를 거스르는 일로 비(非)미국적”이라고 했다. 반면 트럼프의 첫 탄핵 소추를 주도했던 애덤 시프 민주당 하원의원 등은 “전직 대통령 기소는 전례 없는 일이나 트럼프가 해온 불법행위들 또한 전례가 없다”며 기소를 환영했다. 진보 진영은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다’는 원칙을 내세우고 있지만, 일각에선 ‘섣부른 기소는 트럼프에 대한 정치적 선물’이라며 경계하고 있다.

트럼프는 이날 본인 소유인 플로리다주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성명을 내 “이것은 정치적 박해이자, 역사상 가장 높은 수위로 자행된 선거 개입”이라고 반발했다. 2024년 대선 재출마를 선언한 자신에 대한 민주당의 정치적 ‘마녀사냥’이란 것이다. 트럼프의 언행이 지지자들을 자극해 발생한 2021년 1월 워싱턴DC 의사당 난입 같은 폭력 사태가 뉴욕 등에서 재현될 가능성을 두고 미국은 치안 비상 경계에 돌입했다. 이날 맨해튼 검찰·법원 등 주요 기관엔 무력 시위에 대비해 바리케이드가 설치됐고 도시 전체에 경찰이 증강 배치됐다. 곳곳에서 기소 찬반 시위가 일면서 뉴욕시는 극심한 교통 체증을 빚었다. 뉴욕 경찰은 시위 및 시민 충돌 등에 대비하기 위해 모든 경찰에게 비상 대기령을 내린 상태다.

오는 4일 트럼프가 맨해튼 법원에 출두하는 초유의 장면이 어떻게 펼쳐질지도 관심사다. 통상 형사 중범죄 혐의자가 체포될 때는 수갑을 찬 채 포토라인에 서고 지문을 채취하며 머그샷(용의자 촬영 사진)을 찍는다. 트럼프는 비밀경호국 요원 경호 속에 출두할 전망인데, 검찰이 전직 대통령임을 감안해 이런 절차를 생략할지도 오리무중이다. 전례도 가이드라인도 없다. 트럼프는 “차라리 나를 수갑 채워 데려가라. 그것이 더 극적일 것”이라며 지지자 규합을 위해 검찰을 부추기고 있다.

트럼프가 정확히 무슨 혐의로 기소됐는지는 4일 공소장이 공개돼야 알 수 있다. 5년 넘게 사건을 수사해온 맨해튼 지검은 대배심 결과를 봉인해 법원에 제출한 상태다. 트럼프는 최근 대배심이 계속 연기돼 기소 자체가 불발될 수 있다는 예상을 하다가, 이날 기습적인 기소 통보를 듣고 충격에 빠졌다고 뉴욕포스트가 전했다.

트럼프는 2016년 10월 대선을 한 달 앞두고 스토미 대니얼스라는 예명을 쓰는 성인 배우가 10년 전 사업가이자 TV쇼 진행자였던 트럼프와 TV 출연 등을 미끼로 수차례 혼외 성관계를 가진 사실을 폭로하려고 하자, 침묵을 요구하며 그 대가로 13만달러(약 1억7000만원)를 변호사를 통해 지급한 혐의를 받는다고 알려졌다. 또 비슷한 시기 성인 잡지 플레이보이 모델 캐런 맥두걸 역시 트럼프와의 성관계를 공개하려 하자, 트럼프 측이 자신과 연계된 타블로이드 신문을 통해 15만달러(약 1억9000만원)에 맥두걸의 스토리를 독점 구매한 뒤 보도하지 않게 한 일명 ‘취재 후 죽이기(Catch and Kill)’ 방식을 이용한 사건도 검찰 조사 대상이었다. 두 사건이 모두 공소장에 포함됐을 가능성이 있다.

불륜이나 입막음 돈 자체는 미국에서 범죄가 아니다. 최대 쟁점은 불법 기부에 따른 선거법 위반 혐의다. 코언 변호사가 대니얼스 문제를 알아서 정리하기 위해 13만달러를 줬다면 사실상 트럼프에 대한 정치자금 기부인데, 이는 정치인에게 2700달러(350만원) 이상 기부 시 신고하게 돼있는 연방 선거관리자금법 위반 중범죄에 해당한다.

향후 정치적 여파는 ‘시계 제로’다. 법원에서 증거 부족 등으로 트럼프에게 무죄를 선고하거나 일부 혐의만 인정할 경우 검찰과 민주당에 역풍이 일 가능성이 크다. 반면 트럼프가 수갑을 차고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이거나 유죄가 인정될 경우 그의 2024년 대선가도에 치명타가 될 수 있다. 다만 형사 기소나 그에 따른 사법 처리를 받았다고 해서 대선 피선거권이 박탈되는 것은 아니다. 또 트럼프가 기소·유죄 선고 상태에서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면, 면책·불체포 특권을 이용해 기소 전력 등을 무력화할 수도 있다고 NYT는 전망했다.

[뉴욕=정시행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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