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27 (수)

이슈 끊이지 않는 성범죄

"이런 나라에서 아이 키우겠나" 양육비 피해자들이 '미투' 나선 까닭은

댓글 1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부모 "정부 제재에도 양육비 미지급 여전"
양육비 이행·감치 명령, 형사 고소 '하세월'
여야 양육비 공약에 "포퓰리즘 불과" 비판도
'선지급제' 실현 위해 재원 확보 고려해야
한국일보

게티이미지뱅크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런 나라에서 누가 아이를 키우고 싶어 할까요. '양육비 미투(Me too)'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경기 수원시에 사는 송모(44)씨는 전 남편에게 14년 동안 양육비를 받지 못했다. 밀린 양육비는 약 8,000만 원. 초등학생이던 딸이 대학교 졸업반이 될 때까지 송씨는 홀로 양육을 책임져야 했다. 그는 "아이를 키우기 위해 간호조무사, 퀵서비스, 보험·화장품 영업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토로했다. 가까스로 생계를 이어왔지만 최근 건강이 악화돼 일까지 그만둔 그는 대학원에 가고 싶어 하는 딸에게 도움을 줄 수 없는 현실이 막막하기만 하다.

송씨를 비롯한 양육비 피해자 20여 명이 직접 미지급자의 신상정보를 올리는 '양육비 미투'에 나섰다. 피해자들은 지난 5일부터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미지급자의 이름·나이·얼굴 등 인적사항을 공개하며 양육비 지급 절차의 간소화를 요구하고 있다. 사적 제재라는 위험성에도 이들이 두 팔 벗고 나선 이유는 정부의 제한적인 제재와 복잡한 양육비 이행 절차로는 양육비를 받을 수 없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제재 조치로 양육비 미지급 해결 안돼

한국일보

양육비 미지급 피해자 김모(39)씨가 5일 페이스북에 양육비 2,800만 원을 지급하지 않은 전 남편의 이름을 공개했다. 페이스북 캡처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2021년 7월 '양육비 이행확보 및 지원에 관한 법률'(양육비이행법) 개정안이 시행되면서 정부가 △명단 공개 △출국금지 △운전면허 정지 등 제재 조치를 가할 수 있게 됐지만 여전히 양육비를 받아내기는 쉽지 않다. 양이원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여성가족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개정안 시행 이후 지난해 12월까지 제재를 받은 양육비 미지급자 504명(중복 제외) 가운데 양육비를 전부 지급한 비율은 4.6%(23명)에 불과했다.

세 자녀를 홀로 키우는 안모(41)씨는 2019년 이혼한 뒤 양육비 5,000만 원을 미지급한 전 남편의 이름을 공개했다. 그는 "면허 정지를 풀어달라고 200만 원을 딱 한 번 보낸 게 전부"라며 "내내 '양육비 보내면 네가 쓸 거 아니냐'는 식의 무책임한 태도로 외면하고 있다"고 분노했다. SNS에는 '두 아이 양육비를 미지급한 조○○씨를 찾습니다', '19년 가까이 양육비를 주지 않은 윤◇◇입니다' 등 '나쁜 부모'에게 심리적 압박이라도 가하기 위한 피해자들의 성토가 이어지고 있다.

'감치 명령'받아야 고소 가능


지속적으로 양육비를 주지 않는 채무자에 대한 형사 처벌도 가능해졌다. 그러나 까다로운 '감치 명령'(구치소 등에 가두는 행위) 절차를 거쳐야만 고소가 가능한 구조다. 현행법에 따르면 양육비 미지급으로 감치 명령을 받고 1년 안에 밀린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으면 1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 벌금형에 처한다. 국회 여성가족위원회는 23일 출국금지 등 다른 제재의 경우 이행 명령만 받아도 시행할 수 있도록 한 개정안을 통과시켰지만, 형사 처벌 요건을 명시한 규정은 그대로다.

어렵게 정식 재판을 받아도 가볍기만 한 판결은 양육자들의 희망을 짓밟고 있다. 2022년 10월 첫 형사 고소가 이뤄진 뒤 현재까지 실형이 나온 사례는 없다. 지난해 11월 이혼한 뒤 세 자녀 양육비 4,100여만 원을 미지급한 A씨는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은 뒤 법원 담장을 넘어 도망치기도 했다. 전 남편을 상대로 고소를 준비하고 있는 김모(39)씨는 "감치 명령을 받기까지 4년이 걸리고도 고소를 하기 위해 또 기다렸는데, 만약 솜방망이 처벌로 끝나면 처음부터 다시 싸워야 하는 게 아니냐"고 답답해했다.

여야 '양육비 선지급제' 공약, 실현될까

한국일보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지난달 20일 국회에서 열린 양육비 대지급제·양육비 이행강화 정책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정치권에서는 4·10 총선을 앞두고 한부모 가정 표심 공략을 위해 양육비 공약을 앞다퉈 내놓고 있다. 국민의힘은 '한부모 가정·위기 임산부 당당하게 아이 키우기' 공약을 발표해 "악질적으로 미지급하는 채무자의 양육비를 정부가 선(先) 지급하고 후(後) 추징한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전담 기관인 양육비이행관리원을 독립시켜 권한을 강화하겠다고 공약했다. 더불어민주당과 개혁신당도 양육비 국가 대지급제와 양육비 월 최대 100만 원 선지급을 각각 내걸었다.

그러나 여야가 '양육비 선지급제'를 공통적으로 내세운 것은 "포퓰리즘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구본창 양육비해결하는사람들 대표는 "선지급제 법안은 이미 국회에 발의가 돼 있고 (국회 여가위에서) 총선 이후에 논의를 한다고 했는데 폐기 수순을 밟고 있다"며 "서로 '우리가 이기면 해주겠다'고 다투는 격"이라고 했다. 한부모들은 "윤석열 대통령 대선 공약 때도 나왔던 정책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다가 다시 나오는 걸 보면 양육자들을 우롱하는 것만 같다"고 입을 모았다.

선지급제가 현실성을 갖추기 위해선 공약상 재원 마련 방안을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송다영 인천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저출산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서 아이들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국가가 양육비를 선지급하는 건 당연한 흐름"이라며 "정부 예비비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송 교수는 "양육자가 고군분투하지 않아도 국가가 채무자의 재산, 근로 상황을 파악해 양육비를 회수할 수 있어야 한다"며 "양육비 문제는 개인 사이의 갈등으로 풀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김소희 기자 kimsh@hankookilbo.com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