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추론과 자유주의 종식
한반도의 세력권 질서 가능성
자강·연대,역사적 비극 막아야
한반도의 세력권 질서 가능성
자강·연대,역사적 비극 막아야
2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다. AP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2025년 11월 발표된 미국 국가안보전략(NSS)의 핵심은 "먼로 독트린에 대한 트럼프 추론(Trump Corollary)"이다. 먼로 독트린의 뿌리는 워싱턴 대통령의 1796년 고별연설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럽의 분쟁에 얽혀들지 말라"는 유훈은 해밀턴이 기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23년 국무장관 존 퀸시 애덤스는 이 원칙을 확장하여 먼로 독트린을 설계했다. 유럽은 서반구에, 미국은 유럽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상호 불간섭의 원칙이었다.
먼로 독트린은 한 동안 잊혀졌다가 1904년 공화당의 시어도어 루즈벨트에 의해 재탄생했다. 먼로 독트린에 대한 루즈벨트 추론의 핵심은 서반구가 미국의 세력권(sphere of influence)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만성적 비행"에 대해 "국제 경찰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개입주의적 선언이었다.
그러나 후임 대통령들은 이러한 해석을 거부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를 물리치고 대통령이 된 민주당의 윌슨은 먼로 독트린은 민주주의의 확산에 대한 미국의 선교사적 의무를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20세기 중반 민주당 전성시대를 열어젖힌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여기서 더 나아가 먼로 독트린을 상호존중의 선린정책(Good Neighbor Policy)으로 해석했다. 냉전기에 먼로 독트린은 마약과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 하에 중남미 국가에 대한 군사개입의 논리로 정당화되기도 했다.
2025년 국가안보전략은 루즈벨트 추론을 다시 소환했다. 그 특징을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세력권 질서의 부활이다. 트럼프 추론은 세력균형, 주권 존중, 내정간섭이 혼재된 모순적 구조를 보인다. 이를 이해하는 열쇠는 다음 문장에 있다: "더 크고, 더 부유하고, 더 강한 국가들이 비대한 영향력(oversized influence)을 행사하는 것은 국제관계의 영원한 진리이다." 강대국의 우월한 영향력 자체를 국제정치의 자연스러운 현실로 인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세력권 질서란 강대국이 특정 지리적 영역 내에서 비강대국을 통제하고 타 강대국의 개입을 배제하는 체제를 말한다. 힘이 곧 규칙이었던 20세기 중반 이전, 국제질서는 사실상 세력권 질서였다. 트럼프 추론은 국제정치의 시계를 1세기 전으로 되돌리려는 시도이다.
둘째, 역외균형(offshore balancing) 전략의 채택이다. 세력권 질서가 다른 강대국의 부상을 용인하는 것으로 오해되지 않도록, 미국은 "적대적 지배 세력(dominant adversaries)"의 출현을 우방국들과 함께 저지하겠다고 명시했다.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와 금융 중심지로서의 위상도 철저히 수호하겠다고 선언했다. 요컨대 21세기 세력권 질서는 춘추전국시대가 아니라 미국이 관리하는 세력권 질서여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중국에 대한 안보적 언급이 대폭 줄었다. 대만해협에 관해서는 "미국의 오랜 선언적 정책"을 유지하겠다며 중국의 무력 통일도, 대만의 일방적 독립 선언도 지지하지 않는다는 전통적 입장을 재확인했다.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에 대해서도 우방국과 개발도상국의 대중 의존도를 줄이겠다는 정도의 언급에 그친다.
넷째, 안보 인식의 핵심 키워드가 바뀌었다. 2017년 트럼프 1기 NSS가 '경제안보'를 전면에 내세웠다면, 이번 문서의 핵심은 '정체성 안보'다. "유럽이 유럽적으로 남기를 원한다"는 문화적 회복 요구,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 정책의 근절, 국경 통제의 최우선화, 기후변화·넷제로 이념의 거부가 국가안보의 언어로 포장되어 있다. 안보 개념의 문화전쟁화라고 부를 만한 충격적인 언급이다.
결론적으로, 트럼프 추론은 자유주의 국제질서 시대의 종언을 예고하는 선언이다. 한국에 대한 언급은 비중이 작아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대중 무역의존도 축소, 대미 국제수지 균형, 방위비 증액, 제1열도선 방어를 위한 군사력 증강 요구가 일본과 함께 한국에도 닥쳐올 것임을 예고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제질서 대변환이 한국에 주는 함의다. 강대국 중심으로 재편되는 세력권 질서에서 비강대국의 운명은 가혹했다. 한반도는 세력권 질서에서 수많은 침략전쟁과 조공책봉, 그리고 식민지의 역사를 거쳤다. 그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자강과 연대의 전략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
박종희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