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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1 (금)

계곡따라 맺힌 신의 물방울…‘프랑스의 포도밭’ 루아르밸리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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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아르밸리의 시농성과 포도밭 전경. 시농에서는 카베르네 프랑을 주 품종으로 우아한 스타일의 레드와인을 생산한다. ⓒInterLoire/Stevens Frem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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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는 파리 몽파르나스역을 떠나 남서쪽으로 달렸다. 목적지는 아름다운 중세 고성과 수천년 역사를 지닌 와인의 고장 루아르. 시공간을 뛰어넘는 설렘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여행자의 긴장도 잊게 만들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동화 같은 풍경에 빠져들 때쯤 ‘프랑스의 포도밭’으로 불리는 루아르밸리에 다다랐다.

중세 고성 품은 800㎞ 와인 트레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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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약 2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원 중 하나인 퐁트브로 수도원이다. 중세 시대에 지어진 수도원 중 규모가 크고 아름답기로 유명한 이곳에서 ‘루아르밀레짐2024’가 열렸다. 루아르밀레짐은 루아르밸리(이하 루아르)의 와인을 소개하는 행사로 2017년부터 매년 5월 말 각국에서 모인 저널리스트와 수출입 관계자, 홍보 담당자들이 루아르의 와인 생산자들과 만나 다채로운 루아르 와인을 경험한다. 올해는 총 9개국의 33명의 참가자들이 4박5일 동안 380개에 달하는 루아르 와인을 맛봤다.

아름다운 풍경과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루아르는 유럽과 북미, 일본 등 해외에선 인지도가 높은 와인산지이지만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지역이다. 보르도, 부르고뉴, 론, 랑그도크루시용 등 프랑스의 유명한 와인산지 중 루아르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 역시 루아르에 가기 전까지 이곳이 얼마나 매력적인 와인을 생산하는 곳인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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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뮈르성과 루아르강 전경. ⓒInterLoire/Osmany Tava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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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아르는 프랑스에서 가장 긴 강인 루아르강을 따라 펼쳐져 있다. 동화 속 한 장면을 꺼내놓은 듯 아름다운 전원적 풍광 덕분에 ‘프랑스의 정원’이라고 불린다. 프랑스 왕족과 귀족들은 유유히 흐르는 루아르 강가에 성을 짓고 사냥과 휴양을 즐겼는데 강 주변 도시 곳곳에 화려했던 르네상스 시절을 엿볼 수 있는 거대한 고성들과 수도원이 남아 있다. 프랑수아 1세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 샹보르성, ‘귀부인들의 성’이라 불리는 쉬농소성,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잠든 앙부아즈성 등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중세 고성들을 보기 위해 유럽 각지에서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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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아르는 프랑스에서 가장 많은 화이트와인을, 샹파뉴 다음으로 가장 많은 스파클링와인을 생산하는 와인산지다. / 노정연 기자


고성과 함께 루아르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와인이다. 루아르는 프랑스에서 세 번째로 큰 와인산지로 루아르강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800㎞의 와인 트레일에는 4만2000㏊에 달하는 포도밭이 펼쳐져 있다. 프랑스에서 세 번째로 많은 AOC(원산지통제명칭)를 생산하고 있으며 프랑스 내에서 가장 많은 화이트와인을, 샹파뉴 다음으로 가장 많은 스파클링와인을 생산하는 곳이기도 하다.

루아르 와인의 역사는 프랑스 역사 자체나 다름없다. 과거 로마제국이 이 지역을 정복했을 때부터 포도나무를 심기 시작해 그 역사가 2000년이 넘는다. 왕과 귀족들의 와인으로 위세를 떨쳤던 루아르 와인은 프랑스대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며 남부 와인산지에 밀려 위기를 맞는 등 부침을 겪었지만 지금은 프랑스의 레스토랑이나 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대중적인 와인이 됐다. 매년 이곳에서 생산되는 와인 약 2억5000만병 중 약 80%가 프랑스 내에서 소비된다.

모든 스타일을 가진 각양각색 루아르 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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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아르밸리 주요 와인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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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부터 본격적인 루아르 와인 탐험이 시작됐다. 가장 먼저 만난 와인은 샴페인과 같은 방식으로 만든 스파클링와인 ‘크레망 드 루아르(Cremant de Loire)’. 맛도 보기 전에 투명한 분홍빛 와인 속 작은 기포가 반짝이며 피어오르는 모습에 시선이 사로잡혔다.

드라이한 스틸와인부터 생동감 넘치는 스파클링와인, 깊고 우아한 스위트와인까지, 루아르는 거의 모든 스타일의 와인이 생산되는 지역으로도 유명하다. 소비뇽 블랑과 슈냉 블랑, 멜롱 블랑 등 신선하고 섬세한 화이트와인은 루아르를 대표하는 와인으로 이 지역 생산 와인 중 가장 큰 비중(37%)을 차지한다. 로제와 크레망을 비롯해 타닌이 적어 가볍고 향긋한 레드와인도 사랑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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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기후와 지형을 가진 루아르밸리. ⓒInterLoire/Philippe Cahar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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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아르 와인이 이처럼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독특한 자연환경에서 찾을 수 있다. 프랑스 한복판에서 대서양 연안에 이르기까지 동서로 길게 뻗은 루아르강을 따라 대륙성 기후와 해양성 기후가 함께 나타나는 데다, 강둑에 펼쳐진 넓은 평야와 비탈진 언덕 등 지형 역시 다양해 재배되는 포도 품종이 20종이 넘는다. 비옥한 화산암과 석회질, 점토질의 토양도 와인에 풍부한 미네랄리티와 캐릭터를 더하는 역할을 한다.

해산물과 찰떡궁합 화이트와인 ‘뮤스카데’
샴페인 못지않은 스파클링 ‘크레망 드 루아르’


지역별 와인산지의 특성을 알면 좀 더 쉽게 루아르 와인을 즐길 수 있다. 루아르는 크게 4개의 지역으로 나뉘는데 대서양과 가장 가까운 ‘낭테’를 기준으로, 동쪽으로 ‘앙주-소뮈르’와 ‘투렌’, 가장 서쪽에 ‘상트르루아르’가 위치해 있다. 이들 대단위 지역의 소산지에서는 각기 다른 개성 있는 와인들을 생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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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빛깔의 스파클링 와인 ‘크레망 드 루아르’. / 노정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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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대서양 쪽의 낭테는 강수량이 많고 1년 내내 기온이 온화하며 일교차와 연교차가 적은 해양성 기후를 띠고 있다. 이곳에서는 ‘뮤스카데(Muscadet)’로 불리는 ‘믈롱 드 부르고뉴(Melon de bourgogne)’ 품종이 유명하다. ‘부르고뉴의 멜론’이라는 뜻을 가진 품종으로 처음 수도사들이 이 품종을 발견했을 때 멜론인 줄 알고 그 이름을 붙였다는 설과 포도에서 멜론 맛이 나 이같이 이름지었다는 또 다른 설이 전해진다. 낭테에서는 적당한 산미와 부드러운 특징을 지닌 드라이한 화이트와인을 주로 만든다. 낭테가 바닷가에 위치해 해산물로 유명한 만큼 게, 가재와 같은 갑각류와 굴, 조개 등 싱싱한 해산물과 어우러지면 더욱 그 진가를 발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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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뮈르 지역의 대표적인 레드와인 ‘소뮈르 샹피니’. 타닌이 적고 산뜻한 스타일로 차갑게 즐긴다. / 노정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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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테를 지나 루아르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앙주-소뮈르 지역이 나온다. 온화한 해양성 기후와 계곡 기후의 영향을 함께 받는 이곳에서는 레드와 화이트, 로제, 스파클링, 스위트 등 다양한 와인이 생산된다. 대표 포도 품종은 카베르네 프랑(레드와인)과 슈냉 블랑(화이트와인). 카베르네 프랑으로 만드는 ‘소뮈르 샹피니(Saumur Champigny)’는 꽃향기와 산딸기 향이 풍부하고 가볍게 마시기 좋은 스타일로, 레드와인이지만 차갑게 즐겨도 맛있다. 앙주 지방의 로제와인(로제 당주·Rose d’Anjou)도 유명한데 카베르네 프랑과 그롤로, 가메를 블렌딩해 만든다. 달콤하면서도 산뜻한 맛을 지닌 선명한 핑크빛 와인으로 눈과 입이 동시에 즐겁다. 스파클링와인도 빼놓을 수 없다. 소뮈르 지역의 토양은 샹파뉴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를 토대로 샤르도네, 슈냉 블랑과 같은 품종을 재배해 고품질의 스파클링와인 ‘크레망 드 루아르’를 만든다.

카멜레온 같은 ‘부브레’·처음 맛 본 레드 ‘시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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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한 스타일부터 세미 스위트 타입까지 취향대로 즐길 수 있는 ‘부브레’. / 노정연 기자


좀 더 내륙에 있는 투렌 지역에서는 ‘부브레(Vouvray)’‘시농(Chinon)’ 와인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부브레는 루아르 계곡의 서늘한 기후에서 자란 슈냉 블랑 품종으로 만들어지는데 숙성도에 따라 서양배와 모과, 푹 익은 사과 향 등이 나타난다. 부브레는 같은 포도 안에서 과실의 완숙도가 다른 슈냉 블랑의 카멜레온 같은 매력을 고스란히 지녔다. 스틸와인과 스파클링, 드라이한 스타일부터 세미 스위트한 타입까지 있어 취향별로 즐길 수 있다. 시농에서는 카베르네 프랑을 주 품종으로 풍부한 과일 향과 부드러운 타닌 맛을 느낄 수 있는 우아한 스타일의 레드와인을 생산한다. 루아르는 캐러멜라이징한 사과파이 ‘타르트 타탱(Tarte tatin)’이 유명한데 루아르의 디저트와인뿐 아니라 시농과 같은 레드와인과도 당도나 산도 면에서 좋은 궁합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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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럽고 우아한 레드와인 ‘시농’과 루아르의 유명 디저트 ‘타르트 타탱’. / 노정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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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아르와인은 빵과 과일, 치즈 등 다양한 음식과 어울린다. 특히 이 지역 특산품인 염소치즈와 함께 마시면 그 맛이 더욱 살아난다. / 노정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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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루아르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상트르루아르는 강수량이 적고 일교차와 연교차가 큰 내륙성 기후를 띠고 있다. 대표 품종은 전체 생산량의 80% 차지하는 소비뇽 블랑. 루아르 하면 빼놓을 수 없는 화이트와인인 ‘상세르(Sancerre)’ 와인이 이 품종으로 만들어진다. 특히 이 지역의 특산품인 신선한 염소치즈는 루아르의 드라이한 화이트와인과 맛의 조화가 좋다. 루아르 와인을 제대로 맛보고 싶다면 꼭 함께 먹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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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아르의 열정적인 와인 생산자들. / 노정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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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아르에서 만난 열정적인 와인 생산자들은 루아르 와인의 강점으로 ‘다양성’을 꼽았다. 모든 종류의 와인이 생산되기 때문에 누구나 취향에 맞는 와인을 찾을 수 있다는 것. 혹자는 그 다양성 때문에 선택을 주저하기도 하지만 귀찮다고 지나치기엔 루아르에는 좋은 와인이 많다. 라벨을 탐험하는 약간의 모험심을 발휘한다면 누구나 나에게 꼭 맞는 와인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인터뷰 / 소피 탤벗 루아르 와인협회 디렉팅 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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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 탤벗 루아르 와인협회 디렉팅 매니저. / 노정연 기자


- 루아르 와인이 가진 가장 큰 강점은 무엇인가.

“다양성은 루아르 와인이 가진 중요한 가치다. 드라이한 화이트와인부터 로제, 레드, 스파클링, 스위트와인까지 누구든 취향에 맞는 와인을 찾을 수 있다.”

- 한국에서는 아직 루아르 와인의 인지도가 높지 않다. 한국 시장을 어떻게 전망하나.

“루아르 와인은 한국에 2012년부터 진출하기 시작했는데 2022년을 기점으로 급격히 시장이 커지며 우리에게도 중요한 지역이 됐다. 특히 레드와인을 찾는 한국 소비자가 많아졌다. 루아르의 레드와인은 타닌이 적어 산뜻하고 프루티하다. 루아르를 대표하는 화이트와인 역시 한국에서 시장성이 크다고 본다. 아직 유럽과 북미, 일본 시장에 비해 수출 규모는 작지만 한국은 루아르에 새로운 가능성과 기회를 주는 시장이 될 것이다.”

- 한국 음식에 추천하고 싶은 루아르 와인은 무엇인가.

“루아르 와인은 종류가 다양한 만큼 여러 음식과 어울린다. 생선, 육류, 치즈를 비롯해 스파이시한 음식과도 어렵지 않게 페어링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제주도를 방문했을 때 놀라운 경험을 잊지 못한다. 바비큐를 비롯한 모든 음식이 매우 맛있었다. 매콤한 한식에는 루아르의 로제와인을 추천하고 싶다. 맵고 강한 음식과도 잘 어울리는데 특히 김치와의 조합이 어떨지 궁금하다.”

- 마지막으로 한국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Come to Loire! 루아르는 역사가 깊은 프랑스의 고도로 풍경도, 즐길 거리도 다양하다. 아름다운 고성과 포도밭, 맛있는 와인과 음식들, 따뜻한 환대를 즐기다 보면 지루할 틈이 없다. 루아르 강변을 따라 다채로운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자전거 여행도 추천한다.”

노정연 기자 dana_f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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