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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수제비와 비빔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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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아무튼, 레터] 김훈 산문집 ‘허송세월’을 읽다가

조선일보

김훈 산문집 '허송세월'. 작가는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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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산속 절 마당에서 50대 남자가 담배를 피우다 노스님에게 걸렸다. 사찰은 금연 구역이다. 스님은 작았고 얼굴에 주름이 가득했지만 위엄이 있었다.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노스님이 말했다. “담배를 피우는구나.” “그렇습니다.” “끊어라. 딴 데 가서 피우란 말이 아니다.” “이게 끊어지는 게 아닙니다.”

노스님이 그를 노려보았다. “말을 잘하는구나. 자네가 안 피우면 되는 거야. 피우면 못 끊는 거고.” 남자는 벼락이 뒤통수를 치는 충격을 받았다. 무참해서 물러났다. 돌아가는 등 뒤에 대고 스님이 말했다. “산은 금세 어두워진다. 조심해서 내려가라. 담배 피우러 절에 오지 마. 가서 끊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된 김훈 산문집 ‘허송세월’을 읽다가 모처럼 소리 내 웃었다. 혼난 남자가 김훈이다. 네가 안 피우면 끊는 거다, 라는 단순한 한마디에 더 이상 들이댈 말이 없었다고. 노스님은 고도로 응축된 단순성으로 인간의 아둔함을 까부순 것이다. 알면서도 실천하기가 어려운 속세 중생의 괴로움이여.

조선일보

소설가 김훈이 지난 4월 17일 서울 서초구 반포4동 성당에서 '땅 위에 세우기'라는 주제로 정약전, 정약용, 황사영, 안중근의 신앙과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오종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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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더 오래 눈길이 머문 대목은 ‘수제비와 비빔밥’(195~200쪽)이다. 먹을 것이 모자라던 시절에 그의 가난한 어머니는 가끔씩 수제비를 만들어 식구들을 먹였다. 밀가루 반죽을 오래 치대야 수제비가 차지고 국물이 맑다. 수제비에는 어머니의 손바닥 굴곡이 남아 있었고 식감은 쫀득쫀득했다.

비빔밥을 만들 때 어머니는 흰 쌀밥에 여러 가지 나물들과 고추장, 들기름을 넣고 가볍게 비볐다고 한다. 어린 김훈이 주걱을 들고 비비는 것을 거들 땐 “으깨지 말고 치대지 마라. 반죽을 만드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비빔밥에는 흰 밥알의 존재가 한 개씩 살아 있어야 하고, 여러 가지 나물들의 개별성이 뒤범벅되면서 파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어머니의 원칙이었다고 작가는 썼다.

밀가루 반죽을 주무르는 손길과 비빔밥을 비비는 손길은 힘과 질감과 작동 방식이 이렇게 다르다. 막히는 도로 위에서 김훈은 이 세상의 모든 갈등과 다툼과 불화와 적대 관계를 버무려서 서로 의지하는 세상을 만들어 내야 하는 사람의 손길과 마음은 어떠해야 하는가 생각했다. 차 때문에 차가 가지 못하고 있었다. “다들 오도 가도 못 했다”는 마지막 문장을 읽는데 경박하게도 배가 고팠다. 수제비와 비빔밥, 두 손길 중에 하나를 고르기로 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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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돈규 주말뉴스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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