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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9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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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받아야 할 한국 문화 많아” 한국·프랑스 합심해 ‘한국어 교과서’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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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 고교생의 첫 한국어 교과서

노선주 디종한글학교 교장 인터뷰

‘가자, 한국!(Allons-y, Corée)’ 내달 2일 시작되는 가을학기부터 프랑스 고등학교에 처음으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과서가 배포된다. 프랑스 교육부가 2014년 한국어를 공식 외국어 과목으로 채택한 지 10년만이다. 지난달 23일 프랑스의 교육 출판사인 ‘블랭’사가 초판 3000권을 찍었다.

한국어로 된 교과서를 펴낸 주인공은 노선주 디종한글학교 교장(53)이다. 프랑스 부르고뉴 디종 지역에서 현지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지난달 29일 본지와 만난 노선주 교장은 “드디어 프랑스 고등학생들의 눈높이와 말투를 반영해 한국어·한국문화를 교육할 수 있게 됐다”며 활짝 웃었다. 프랑스 뿐만이 아니라 다른 EU 국가들 초·중 교육과정에도 활용된다. 책임 집필자인 노 교장은 재외동포청이 주최하는 ‘2024 한글학교 교사 모국 초청 연수’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에 일주일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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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고등학교들에서 사용될 첫 한국어 교과서를 집필한 노선주 디종한글학교 교장이 본지와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장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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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과서엔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한 내용도 담겼다. 한국의 고유 명절 문화에서부터 유행하는 노래, PC방 및 인생네컷 등 생활상도 담겼다. 교과서를 볼 학생들의 또래인 한국 학생들이 좋아하는 간식, 학교 일과 및 학습 과목 등 내용도 담겼다. 노 교장은 “한국문화를 좋아하는 프랑스인들은 많지만, 한국에 대해 정말로 잘 아는 프랑스인들은 많지 않다”며 “올림픽 개막식 당시 대한민국(République de Corée)을 ‘북한(République populaire démocratique de Corée)로 소개한 사실이 이런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줬다”고 했다.

제작에 착수한 건 지난 2022년 11월, 프랑스 고등학생들의 눈높이와 말투를 반영하기 위해 집필진들이 머리를 맞댔다. 다섯 한국인 저자와 두 프랑스인 편집자는 한 몸이 되어 교과서를 만들었다. 프랑스 전역에 흩어져 거주하는 한국인 저자들은 휴가 기간마다 3주씩 숙식하며 교과서를 만들었다. 모두 프랑스 고등학교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다. 이들은 한국어 교과서가 프랑스 교육과정에 연결되도록 초점을 맞췄다고 한다. 노 교장은 “예산을 출판사에 한 푼이라도 더 보내 더 좋은 교과서를 만들기 위해 한국인 저자들은 원고료도 거의 받지 않고 교과서를 썼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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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9월 학기부터 프랑스 고등학교에서 사용될 한국어 교과서 '가자, 한국!'의 104, 105쪽에는 한국인 학생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인생네컷'이 소개됐다. '인생네컷'은 한국을 방문하는 프랑스 학생들에게 필수 코스이기도 하다./장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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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저자들은 꼬박 1년 8개월을 집필에 몰두했다. 교과서엔 저자들이 한국어를 재미있게 가르치기 위한 고민의 흔적이 곳곳에 비쳤다. 프랑스 학생들의 관심사를 반영해 한국어로 소셜네트워크 계정 만들기, 서울여행 가이드북 만들기, 기생충 포스터로 가족관계도 만들기 등의 활동도 담겼다. 교과서 속 예시 문장은 성인용 교재의 존댓말(vousvoyer) 문장과 달리 학생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반말(tutoyer)로 제시됐다. 학생들에게 친숙하게 읽히기 위한 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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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9월 학기부터 프랑스 고등학교에서 사용될 한국어 교과서 '가자, 한국!'의 84, 85쪽. 프랑스인 편집자들의 요청으로 오후 10시까지 공부하는 한국 고등학생들의 일과, 신발장 등이 소개됐다./장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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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지오반니 피치씨와 마를렌 랑동씨는 “프랑스가 쇠락하고 있는 지금, 본받아야 할 한국 문화가 많다”며 교과서에 삽입할 사진 한 장까지 챙겼다. 피치씨는 “개인과 국가가 합심해 교육에 대한 투지를 불태우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며 한국인 고등학생들의 일과, 수능 당일의 경찰차 사진을 교과서에 실었다. 랑동씨는 프랑스인들도 위생에 신경 쓰자는 취지로 한국의 신발장 문화를 소개했다. 노 교장은 “피치씨와 랑동씨는 휴가를 반납하고 한국인 저자들과 함께 숙식하며 교과서를 만들었다”며 “스스로 ‘프랑스인답지 않은 모습’이라며 농담하더라”고 했다.

노 교장은 “당장은 프랑스 내 고등학교들에서만 이 교과서가 사용될 테지만, 스위스·벨기에·모로코·알제리 등 프랑스어권 유럽 국가와 북아프리카 국가들에까지 이 교과서가 사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또 노 교장은 “유럽연합 국가들은 교과서를 서로 공유하고 있어, 프랑스 교육부의 인가를 받은 이 교과서는 다른 유럽연합 국가 학생들이 다운로드 받아 공부할 수 있다”며 기대를 비쳤다.

노 교장은 “교과서를 집필하는 동안 가족들의 응원을 받아 든든했다”고 했다. 남편 올리비에 뷜리씨는 퇴근 후 원고를 읽으며 ‘프랑스인 입장에서’ 피드백을 줬다. 노 교장은 “집필진이 교과서 등장인물인 ‘모로코인 학생의 어머니’를 히잡 쓴 검은 피부의 여성으로 상정하자, 남편이 ‘어머니가 전문직일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해 흰 가운을 입은 의사로 설정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한국에 남아있는 아버지는 노 교장에게 매주 편지를 써 “네가 자랑스러운 한국의 딸임을 잊지 말아라”고 했다고 한다.

노 교장은 “모두의 마음을 모아 만든 교과서가 곧 프랑스 고등학생들에게 읽힐 거라는 사실에 설렌다”며 “프랑스 학생들이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더 잘 알고 사랑하게 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장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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