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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4 (토)

일본 국민을 꿈꾼 이광수의 짝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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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16년 8월 서울 양천구 목동 대한민국예술인센터 앞에서 한국문인협회의 육당 춘원 문학상 제정 규탄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옆에서 이광수와 최남선을 단죄하는 모습의 거리행위극이 펼쳐지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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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근 | 사회학자



윤석열 대통령의 최근 인사를 계기로 뉴라이트 역사관이 논란이 되고 있다. 독립기념관장으로 임명된 이의 국적 관련 발언이 대표적이다. 원치 않았다고 해도 합병된 이상 한반도의 주민도 법적으로 일본인이 됐다는 것이다. 외국에 나갈 때면 일본 여권을 받았고, 손기정 선수도 일본 대표로 올림픽에 참가했다는 예를 들었다. 모두 사실이다. 다른 나라는 어땠을까? 이를테면 인도인은 영국령 인도제국 여권을 받았고, 올림픽에도 인도 대표로 출전했다. 그렇다면 식민지 조선인은 일본 국민이었을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이 모호함, 그 자의성 속에 일본 식민지배의 본질이 있었다.



조선인은 언제 일본 국민이었을까? 지식인, 상류층 인사가 외국에 나가면 일본인 대접을 받았다. 뉴라이트 쪽에서 조선인이 국제법상 일본인으로 간주됐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1930년대에 세계일주를 한 연희전문학교 상과 교수 이순탁의 ‘최근세계일주기’를 보면 일본 여권을 가진 그는 일본인 대접을 받는다. 일본 대사관의 도움으로 대공황에 대처하는 런던 세계경제회의의 폐막 총회도 참관한다. 여성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은 1920년대 말에 남편 김우영과 함께 세계일주를 한다. 만주국에서 부영사로 근무한 김우영에게 일본 외무성이 내린 포상 여행이었다. 군축회의가 열리던 제네바에서는 일본 대표단 부부들과 식사하고 공식 만찬에도 참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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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노병옥


조선인이 열강 일본의 국민으로 대접받은 사례가 이렇게 버젓하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1941년, 내선일체의 길에 앞장서던 이광수가 가야마 미쓰로라는 창씨명으로 일본 잡지 ‘문학계’에 실은 글 한편에 문제가 집약되어 있다. 이광수는 참된 일본인이 되려고 애쓰는 자신의 처지를 불교를 수행하는 ‘행자’에 빗댄다. “모든 종래의 조선적인 마음을 씻어내지 않으면 안 되지요. … 조선의 사방에는 오늘 처음으로 죄란 죄는 없어질 때까지 갈고닦아야 합니다.”



같은 국민이라면서 왜 한 국민이 다른 국민에게 죄인됨을 고백하고 있을까? 실은 국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을 합병하면서 일본은 서구 제국주의처럼 식민지를 만든 게 아니며 하나의 나라가 됐다고 선전했다. 뉴라이트 인사들이 앵무새처럼 되뇌는 논리다. 하지만 원래 광고는 그대로 믿으면 안 되는 법. 같은 나라라면서 일본은 한반도에 일본 헌법을 적용하지 않았다. 일본인으로 규정하는 국적법도 실행하지 않았다. 제국의회가 만든 법률도 실행하지 않았다. 참정권도 부여하지 않았고 의무교육도 실시하지 않았다. 조선은 일본 의회의 통제를 받지 않는 조선총독의 명령으로 통치되는 법이역이었다. 국민의 당연한 법적 권리는 부여하지 않은 채 1943년 3월, 징병제를 공포하고 이후 실행에 옮겼다. 그러니까 피만 요구한 것이다.



국적법을 사례로 좀 더 자세히 따져보자. 국적법을 실행하지 않음으로써 일제는 조선인을 일본 국민으로 대우해야 하는 부담을 회피했다. 다른 효과도 있었다. 근대의 국적법은 국적 획득 기준을 규정함과 동시에 국적 이탈 권리도 부여한다. 당시 일본 국적법에도 국적 이탈 조항이 있었다. 국적법을 실행하면 조선인은 합법적으로 일본 국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당시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귀화나 망명 상태였다. 국적법을 실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제는 이들의 국적 이탈을 인정하지 않고 모두 일본인으로 간주했다. 여차하면 체포하고 투옥했다. 합병 전인 1910년 4월에 망명 뒤 중국과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한 신채호 선생이 대표적인 사례다. 대만에서 체포되어 뤼순 감옥에서 복역하다 감옥에서 죽었다. 일제의 호적에 이름을 올린 적도 없는데 일본인으로 간주해 체포하고 고문하고 죽였으니 반인륜 범죄다.



그래도 일본 국민 대우를 받은 이들은 행복했을까? 베를린올림픽 기록영화를 보면 금메달을 딴 일본 대표 손기정은 환호하기는커녕 시종 고개를 숙이고 있다. 들고 있던 참나무 묘목으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렸다.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한번도 일본을 위해 뛰어본 적이 없다. 나와 내 나라 조선을 위해 뛰었을 뿐이다.”



이순탁은 다르다. 은근히 일본인 대우를 즐긴 흔적이 있다. 하지만 귀국하는 배에서 상념에 젖는다. “떠날 때에는 용기백배로 온갖 호기심을 가졌지마는 돌아와서 본즉 나에게는 이전 용기는 간 곳 없고 넋 잃은 사람 같으며, 모든 호기심은 다 사라지고 도로 옛날의 자신 그대로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돌아오면 결국 “옛날의 자신 그대로” 식민지인이었다. 이순탁은 1938년 4월, ‘연희전문 경제연구회 사건’으로 같은 학과의 교수, 학생들과 함께 구속되어 1940년 7월까지 복역했다. 출소 뒤에도 복직하지 못했다. 온건한 실력양성론자조차 식민지인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민족 차별을 ‘극복’하고 온전한 일본 국민 대우를 받은 사례도 있다. 일본에서 활약한 우익 정치깡패 박춘금은 1932년, 1937년, 두번이나 일본 제국의회 중의원에 당선됐다. 해방 뒤 돌아오지 않고 평생 일본에서 살았다. 일본어로 작품 활동을 하며 일본 문단에서 인정받기도 한 소설가 장혁주도 돌아오지 않고 일본인으로 살았다. 일본 국민이라서 행복했을 것이다. 이런 사람도 있는 법이다.



일본은 필요할 때만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간주해서 체포하고 강제동원했다. 동등한 일본 국민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뉴라이트의 상상 속에서만 조선인이 일본인과 동등한 일본 국민이 된다. 오늘날 특정 지역의 한국인에 대해 헌법도 국적법도 적용하지 않고, 참정권과 의무교육 등 국민의 권리도 부정하는 일을 상상할 수 있을까? 그런 비현실적 상상이 현실이 되는 곳, 거기가 바로 식민지다.



그 와중에도 차별을 ‘극복’하고 일본 국민이 된 극소수가 있었다. 이광수는 모두 그렇게 일본 국민이 되는 세상을 꿈꿨다. 어리석은 짝사랑이었지만 바로 그래서 이런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조선인이 진짜 일본 국민이 됐다면 행복했을까? 그 나라 일본제국은 ‘천황’이 주권자인 파시즘 국가였다. 민주주의도 인권도 없는, 고문이 일상인 전체주의 국가였다. 전쟁을 일으켜 세상을 참화에 빠뜨리고 민간인을 학살하는 나라였다. 차별받지 않은 채 같이 침략자가 되면 좋은 일인가? 국적 논란을 넘어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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