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생과 서울대생을 잃고 서민 상권으로 악전고투하고 있는 이 지역 상인들을 표본 삼아 자영업의 실태를 제대로 들여다보고 싶어서였다. 의심과 짜증, 문전박대의 시간을 꽤 오래 견뎌낸 기자들에게 28개 점포의 자영업자 32명이 차례차례 문과 마음을 열었다.
그들의 속 깊은 이야기는 자영업의 역사와 실태에 대한 소고(小考)일 뿐 아니라 그 자체로 한국현대사였다. 뼈 빠지게 일만 해온 그들은 사회 구조 변화에 휩쓸리면서 아무 잘못도 없이 밑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서울대생과 고시생 손님으로 북적였던 1995년 녹두거리(왼쪽)와 이제는 그들의 발길이 끊겨 썰렁한 2024년 녹두거리(오른쪽)의 모습. 사진 서울대 대학신문, 김현동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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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천가마솥순대국 대학점 권영웅(71)씨는 아직도 1965년의 명동 거리가 눈에 선하다. 경북 청송에서 갓 올라와 서울의 중심을 접한 그는 기꺼워할 여력이 없었다. 그에게 명동은 유람이 아니라 생존의 무대였다.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서울로 몰려왔던 동류 중에서도 그는 도드라졌다. 그는 당시 국민학교 6학년이던 12세 소년이었다.
경북 청송 고향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일찍 남편을 잃은 모친은 5남매를 먹여 살리느라 눈코 뜰 새 없이 고생했지만 권씨는 늘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상경 선배인 친구의 연락은 복음이었다.
" 서울 식당에서 일하면 배부르게 먹여주고 재워줘. "
자영업 40년, 요식업 60년의 경력을 갖고 있는 병천가마솥순대국 대학점 점주 권영웅(71)씨가 텅 빈 가게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김현동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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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뒷산 나뭇가지를 잘라 모은 뒤 말려 지게에 메고 장에 내다 팔았다. 한 번에 몇십원씩, 수십 차례의 장사 끝에 그의 손에는 노잣돈 600원이 모였다. 그는 그걸 움켜쥐고 혈혈단신 상경했다.
사실상 미아이자 고아였던 12세 소년은 ‘명동 달러 골목’의 한 분식집에서 가냘픈 팔과 다리로 노동을 시작했다. 말 그대로 숙식 제공. 급여는 없었다. 그는 식당 밥을 얻어먹으면서 바닥에 돗자리나 종이박스를 깔고 잤다. 전후의 세계 최빈국에서 아동보호법이나 노동법을 들먹이는 이는 없었다.
다행히도 첫 고용주는 모질지 않았고 인력에 대한 수요는 많았다. 1년 뒤 옮긴 식당에서 그는 월급 1000원을 받았다. 입소문이 나면서 1년 뒤 다른 식당에 스카우트돼 월급(1000원)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정부광화문청사 구내식당, 덕성여대 학생식당 등 무수히 많은 식당을 오가며 성인이 되고 가장이 됐다.
1970년대 명동 거리. 중앙포토 |
그가 자기 가게를 갖게 된 건 1985년, 서른두 살 때였다. 녹두거리의 한 분식집에서 일하던 그에게 어느 날 가게 주인이자 건물주가 제안했다.
" 가게를 접을 텐데 권리금 받지 않을 테니 월세만 내고 운영해보지 않을래? "
그의 첫 가게 만나분식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김씨 인생의 첫 번째 전성기가 막을 올렸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외식이 점점 늘었다. 게다가 서울대 후문이 없을 때라 서울대생이 모두 녹두거리쪽으로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의 가게는 곧 서울대생의 ‘참새 방앗간’이 됐다.
이어지는 권씨의 후반생(後半生)은 곧 한국 자영업의 역사다. 그는 1989년부터 2000년대 초까지 대학동 대관령식당, 숭실대 앞 분식집, 봉천동 장군숯불갈비를 잇따라 여닫았다. 금천구 해물찜 가게는 생의 결실이었다. 50평이 넘는 대형 매장에 직원도 4~5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핵심 고객 공급원이던 인근 공단의 폐업. 허탈하게 녹두거리로 돌아온 그는 의정부 부대찌개집을 거쳐 순댓국집을 경영하며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지난 19일 저녁 한산한 모습의 서울 관악구 대학동 녹두거리. 김현동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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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돌아왔을 때만 해도 고시생들이 많을 때라 환경이 나쁘지 않았어. 지금은 이 동네 인구가 2만명도 안 되지만 그때는 상주인구가 16만명에 달했어. "
칠순을 넘겼지만, 아직도 노동 없는 생존은 불가능하다. 그는 부인과 단둘이 오전 10시부터 자정까지 연중무휴로 일해 겨우 생활비 정도를 벌고 있다.
" 적자 볼 정도는 아니야. 집세 내고 용돈 쓸 정도는 돼. 물론 많지 않아. 사람을 쓰지 않고 겨우 우리 부부 인건비 떨어질 정도야. 물가가 워낙 비싸서 식재료비가 매출의 절반은 차지해. "
물론 두 노인에게는 버거운 일이다. 손님이 많을 때는 메뉴판에 품절 스티커를 붙여 주문을 사전 차단하는 ‘꼼수’를 써야 버틸 수 있다. 일이 고되다고 사람을 사는 순간 적자 인생으로 전락한다.
" 사람 원래 써야 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 월급으로 250만~300만원 줘버리고 퇴직금까지 줘야 하는데 그러면 남는 게 없어. 실제로 사람 쓰는 가게들은 못 버티고 그만둬요. 코로나 때도 사람 쓴 가게는 다 망해나갔고 가족끼리 하는 가게만 살아남았어. "
권씨는 앞날을 예측할 수 없다.
" 할 줄 아는 건 이것밖에 없는데 몇 년이나 더 버틸 수 있을까. 3년? 5년? "
그는 59년 전 명동 거리의 어린아이처럼 막막해 보였다.
■ ‘한국의 아킬레스건’ 자영업…51명의 슬픈 현실을 듣다
665만 자영업자가 벼랑 끝에 섰다. 소득의 추락, 과잉 경쟁과 과잉 노동, 원가 급등과 부채 급증이 그들을 옥죄고 있다. 자영업 문제는 한국의 아킬레스건이기도 하다. 저출산·고령화·인구·복지·빈부격차·지방소멸 등 우리가 직면한 모든 논란거리가 자영업 문제에 결부돼 있다. 지체의 늪에 빠진 한국이 한 단계 더 나아가려면 반드시 털어야 할 난제다.
중앙일보는 창간 59주년을 맞아 자영업 문제 해결을 위한 장기 기획 보도를 시작한다. 먼저 두 달간 발품 팔아 만난 자영업자 51명의 목소리를 토대로 5일에 걸쳐 그들의 비참한 현실을 날것 그대로 보도한다.
후속 보도를 통해서는 숨은 문제들을 발굴하고 국내외 정책들을 점검하면서 해법과 대안을 도출할 계획이다. 정치권과 정부의 각성을 끌어낼 수 있도록 독자와 국민의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특별취재팀=박진석·조현숙·하준호·전민구 기자 kaila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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