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일 오전 서울 한 대학병원 응급실 앞에 진료 지연 안내판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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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민 | 서울 문정고 2학년
대한민국은 뛰어난 의료체계를 가진 나라이다. 장애인으로서 살아가며 수없이 병원을 방문했다. 외래는 물론 입·퇴원도 여러번 반복했다. 여태까지 병원을 이용하며 한국의 의료체계가 매우 탄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젠 이 생각도 옛말이 되었다고 느낀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터지고 방역이 철저해지고 외부 활동을 멀리하게 됐다. 자연스럽게 아픈 빈도수도 줄어들었다. 근 4년간 추적 관찰 목적의 외래를 제외하고선 병원을 딱히 방문할 일이 없었다. 지난 10월26일께, 근 4년 만에 급작스럽게 고열이 났다. 동네 근처의 1차 병원에서 약을 타 먹으며 지켜보기로 했다. 하지만 열이 40도까지 오르고 오한이 들며 도저히 자택 치료가 불가한 상황이라고 느꼈다.
119를 불러 병원 응급실에 가고자 했다. 나를 받아주는 집 근처 3차 병원은 단 한 군데도 존재하지 않았다. 응급실이 만실도 모자라 대기자가 병원마다 10명 이상 있으며, 내게 기저질환이 있고, 정기적으로 다니는 3차 병원―집에서 1시간이 걸려 구급차 호송이 불가능한 거리이다―이 있기 때문에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구급대를 그대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큰 외상을 입거나 호흡곤란이 와 생사를 오가는 환자들보다는 당연히 ‘경증 환자’였다. 그러나 40도의 고열을 그대로 두고 다음날 아침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이전에도 몇번 이런 고열이 난 적이 있었다. 초기에 고열과 염증을 잡지 못하면 증상이 악화하거나 전이되어 생명이 위독해질 수도 있다. 당장 갈 수 있는 병원을 계속 찾아 헤맸다.
평소 다니는 3차 병원에 연락하자 ‘1차 병원 의뢰서를 가져오면 예진을 볼 수 있으나, 처치를 바로 받거나 입원할 수 있다는 장담을 못 한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때 수도권 소재의 3차 병원 중 나를 받아줄 곳은 한 군데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주변 지인을 수소문해 운이 좋게 겨우 2차 병원에 입원해 치료받을 수 있었다.
이번 일을 겪으며 이전보다 입원하기 무척 어려워졌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뉴스로만 접하던 전공의 파업이 의료체계에 무척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구급차에 탄 채로 병원 여러 곳을 전전하는 도중 사망한 사람들이 있다는 소식을 여러번 접했다. 이에 여태껏 분노하면서도 쉬이 믿기지 않았다. 병원을 알아보다가 덜컥 ‘이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두려워졌다.
‘기저질환자이기 때문에’ 병원에서 쉬이 받아주지 않는다는 말은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다. 이미 의료대란 탓에 응급실에 자리가 없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콕 집어 기저질환을 사유로 삼으니 마치 폭탄 돌리기 게임의 폭탄이 된 기분이 들었다. ‘기저질환자라면 증세가 악화할 가능성이 높으니 적극 수용해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도 했다. 가장 먼저 치료를 받고 싶다는 말이 아니다. 적어도 병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하고 손쓰기 힘들 만큼 상태가 악화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최근 학생으로서 의대 정원 확대 소식을 자주 접했다. 의사가 늘어나더라도 정작 제때 치료받을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일까? 물론 모든 과가 중요하지만, 현재 가장 인력이 필요한 응급의료, 지역의료를 담당하는 의사는 끊임없이 줄어들고 있다. 인간이라면 박봉에 고된 일을 하는 선택지보단 편하게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선택을 하고 싶어 함에 동의한다. 하지만 모두가 이러한 선택을 하는 구조가 되면 갑자기 아플 때 피부과나 성형외과 외엔 찾아갈 곳이 없는 날이 오는 것 아닐까? 하루빨리 의료진의 처우가 개선되길 바란다.
건강하면 ‘남 일’인 이야기에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이 더 많을 것이다. 이 말은 비틀어 생각하면 누구든지 아프면 ‘내 일’이 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 사회가 건강하게 지속될 수 있도록 더 많은 사람이 의료대란과 인력·병상 부족 문제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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