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 판타지와 현실 사이
카라바조의 ‘그리스도의 매장’. 아래로 힘없이 떨어진 예수의 오른팔 묘사를 카라바조는 미켈란젤로의 조각 ‘피에타’에서 차용했다. 세상을 떠난 예수의 무거운 육신, 그것을 버거워하며 땅으로 묻는 성인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바티칸 미술관 소장.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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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 문화부 기자 |
1606년 어느 날 밤 이탈리아 로마. 테니스 코트에서 남자들이 싸움을 시작합니다. 누군가가 칼을 꺼내고, 도망치던 남자는 허벅지를 맞아 쓰러집니다. 피가 흐르자 지켜보던 사람들도 가담해 4명 대 4명이 맞붙는 패싸움으로 번지는데…. 이날 1명은 목숨을 잃고, 칼을 꺼냈던 남자는 죽을 때까지 도망자로 살게 됩니다. 도망자의 이름은 미켈란젤로 메리시, ‘카라바조’란 이름으로 유명화 화가였습니다.
이탈리아 법정 기록과 기사로 남겨진 이 사건으로 카라바조에겐 수백 년간 ‘광기의 화가’, ‘악마의 재능’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어떤 역사가는 그를 ‘그림 실력은 있었지만 높은 지성은 없었다’고 평가했죠. 카라바조는 정말 미친 재능을 감당하지 못한, 광기의 화가였을까요?
야만의 시대, 17세기
카라바조가 살인에 이르는 과정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가 목숨의 위협을 느껴 반격했다는 기록, 상대방도 칼을 꺼내 친구가 치명상을 입었다는 기록 등이 엇갈립니다. 이 외에 길거리나 식당에서 시비가 붙거나 경찰과 말다툼하다 체포된 기록도 남아 있죠. 카라바조가 다혈질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현대인이 보는 범죄와 17세기 현실은 달랐습니다.
카라바조 전기를 쓴 미술사가 앤드루 그레이엄 딕슨은 “카라바조는 폭력적이었지만, 17세기 유럽도 폭력적이었음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는데요. 이때 유럽에서는 누군가가 자신을 모욕하거나 명예를 더럽혔다고 생각하면 ‘결투’를 신청하는 것이 흔했습니다. 여기서 결투란 상대가 죽거나 치명상을 입을 때까지 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게다가 카라바조에 관해 남은 기록이 많지 않고, 그나마 있는 것이 법정 기록이라는 점은 그가 ‘문제적 화가’라는 이미지를 확대 재생산하는 데 일조했습니다. 죽은 화가는 말이 없고 그림은 입이 없으니, 그가 남긴 예술적 자산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채 묻혔다 20세기가 되어서야 제대로 연구됩니다.
글 대신 그림으로 제시한 화두
카라바조는 글 대신 그림으로 17세기 종교 미술이 마주한 질문을 제기합니다. 당시 유럽은 흑사병으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종교 개혁이 일어났으며, 이에 반대해 권위를 지키려는 반종교개혁의 움직임으로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니 평화롭고 조화로운 르네상스 예술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었죠.
이런 가운데 카라바조가 어린 시절을 보낸 밀라노의 대주교는 성직자들을 매주 집합시켜 고해성사 방식을 감시하거나, 교구 내 모든 교회의 그림들을 검사하는 정책을 펼칩니다. 이에 어떤 화가들은 ‘검열’을 벗어나지 않는 그림을 그리려 애를 썼죠. 이렇게 억압적인 분위기에도 로마에서는 성매매 여성이 너무 많아 교황이 칙령을 내려 이들을 몰아내는가 하면, 흑사병으로 충격을 받은 신자들이 스스로를 괴롭게 하며 믿음을 다지는 ‘고행 신앙’이 유행합니다.
폭력과 고통, 성이 뒤섞인 극단의 시대. 카라바조는 사람들이 처한 절박한 현실을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그것을 연극 무대 위에 올리듯 극적인 조명을 비추어 드러냅니다. 순례자를 거리 위의 부랑자처럼 표현한 ‘로레토의 성모’, 세상을 떠난 예수의 육중한 몸을 버거워하며 땅에 묻는 ‘그리스도의 매장’, 부활한 예수의 상처를 손가락으로 찔러보는 ‘토마스의 의심’ 등이 그러합니다.
이렇게 현실을 적나라하게, 장엄하게 드러낸 그림에 거부감을 느낀 사람들은 카라바조의 ‘결점’을 파고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눈 밝은 교회와 귀족의 컬렉터들은 앞다투어 그의 작품을 소장했고, 감각 있는 예술가들은 재빠르게 그의 스타일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했습니다. 루벤스, 렘브란트 같은 거장들이 그들입니다.
피렌체 유력 가문의 후원이 있었던 르네상스 미술이나 아카데미라는 권위 있는 기관의 인정으로 중요하게 여겨진 몇몇 미술 사조에 비하면 카라바조의 바로크는 오로지 실력으로 ‘입소문’을 탄 것으로, 요즘 시각에서 본다면 마케팅 없이 감각만으로 ‘바이럴’하게 전 유럽에 퍼진 예술입니다.
그 배경에는 북구 플랑드르 예술의 사실적 묘사부터 미켈란젤로 등 고전 화가에 대한 경험, 어린 시절 받은 교육의 영향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미술사가 딕슨은 “카라바조는 (성경과 같은) 텍스트를 깊이 읽고 해석해 혁신적인 결과물을 내놓은 화가”라고 했죠.
이렇게 보면 카라바조 예술이 20세기 이후에 재조명받은 이유도 분명해집니다. 이성과 논리만이 아니라 감각, 감정과 결합한 ‘감성’의 가치를 과거에는 눈 밝은 사람들만 알아봤다면, 이제는 그것이 진지하게 연구되고 경제적 가치로도 평가받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죠.
르네상스보다 강력했던 ‘바이럴’
그러니 예술가가 새로움을 창조하는 과정을 더 이상 ‘광기’나 ‘순간의 영감’으로 치부하기는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 고뇌의 과정이 지금은 모두가 알고 싶은 생존 전략이니까요. 카라바조, 빈센트 반 고흐, 미켈란젤로…. 수많은 ‘판타지’에 가려졌던 예술가들의 끈질긴 창조의 과정은 ‘입이 없는’ 예술 작품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한 예술 작품들이 말없이 건네는 이야기를 먼저 마음으로 느껴 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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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 문화부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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