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화 잎사귀가
휘어질 만큼
初雪(はつゆき)や水仙(すいせん)のはのたわむまで
밤새 내릴 모양이다. 첫눈 예보가 있었지만 큰 기대는 없었다. 조금 내리다 그치겠지. 자정 무렵, 하늘에서 희끗희끗 보드랍고 촉촉한 것이 한 잎 두 잎 날리기에 탄성을 질렀다. 와, 첫눈이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처럼 반갑다. 지금 자는 사람들은 아마 못 볼 거야. 곧 녹을 테니까. 첫눈은 그런 거니까. 아무도 모르게 잠깐 내리다가 그치는 거니까. 지금 절기는 소설(小雪)이 아닌가. 눈이 작게 조금만 내리는 때다.
어라, 눈발이 점점 더 거세지네. 새벽 두 시가 지나고 세 시가 지나도 계속 내린다. 발이 푹푹 잠길 지경이야. 큰일이다. 다들 눈 대비를 하지 않았을 텐데. 경사가 심한 곳은 미끄러지겠어. 빙판길이 될지도 몰라. 첫눈을 보며 마냥 기뻐하던 어린이의 마음이 갑자기 의젓하게 어른이 된다. 이봐, 이제 그쯤이면 됐어. 어이, 그만, 그만. 그만 와. 아아, 더 내리네. 자꾸 내리네. 올해 첫눈은 폭설이 될 것 같다. 서울은 벌써 두툼하고 새하얀 담요를 덮었다.
긴긴밤이니 원래 정해둔 단무지 하이쿠는 접어두고 첫눈 하이쿠를 찾자. 바쇼(1644~1694)의 수선화 명시다. 노란 꽃과 하얀 눈이 대비되는 상황이 한 장의 그림처럼 은은하게 떠오른다. 한겨울에도 우아하게 피어나는 자존심 강한 수선화가 차가운 눈 옆에서 더 빛을 발한다. 제일 좋아하는 꽃이다. 마을 꽃집에서 새침하게 앙증맞은 수선화 화분을 만날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두근하네. 친구에게 선물받은 자줏빛 국화가 아직도 저렇게 싱싱한데 어느새 수선화의 계절이다. 첫눈이 그치지도 않고 자꾸만 내리니까 나도 첫눈 하이쿠를 더 읊고 싶다.
첫눈이구나 벽에 난 구멍으로 고향을 본다 (잇사)
첫눈이어라 술 한 모금 마시고 꽃 같은 마음 (세이게츠)
생명이 있어 첫눈을 보게 되는 신선함이여 (히가사 후미)
뒤돌아보니 첫눈이 내리누나 한밤의 마을 (마에다 후라)
첫눈이 내려 하늘의 꽃송이를 손으로 뜨네 (히가노 유키)
꽃 같은 시가 많다. 어느새 새벽 다섯 시. 저런, 눈이 또 내린다. 문득 홋카이도 사는 친구가 한 말이 떠오른다. “눈이라면 지긋지긋해. 일단 퍼붓기 시작하면 지붕 위에 올라가서 쓸어야 하거든. 그래야 집이 안 무너져. 문이 안 열릴 때도 있어. 바위처럼 무거워. 그러니까 밤낮으로 눈을 쓸지. 나한테 눈은 엄청난 노동이야. 꽃이 아니라 일과 땀.” 눈꽃 한 송이 한 송이는 이렇게 솜털처럼 가벼운데, 잔뜩 모이면 집도 쓰러뜨릴 만큼 무거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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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윤 작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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