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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6 (목)

‘러브레터’의 나카야마 미호 사망, 마지막 남긴 사진엔 ‘나는 지옥에 갔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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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영화 ‘러브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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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눈이 덮인 설산(雪山)에서 빨간 스웨터를 입은 일본 여배우 나카야마 미호(中山美穗)는 두 번, 세 번, 네 번 외친다. “오겡키데스카. 와타시와 겡키데스(잘 지내나요. 저는 잘 지내요).” 눈물을 흘리지 않고 옛 연인을 떠나보내는, 꾹 눌러 담은 슬픔에 스크린 앞에 앉은 이들은 마음을 저몄다. 1995년 개봉해 많은 관객들을 울린 러브레터는 한국에서 더욱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일본 문화가 개방된 이후인 1999년 개봉돼 약 14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나카야마 미호가 6일 일본 도쿄 시부야의 자택에서 54세로 숨졌다. 이날 약속에 나오지 않자 자택을 방문한 소속사 직원이 욕조 안에 쓰러져 있던 나카야마를 발견했다. 일본 언론은 “발견 당시 외상은 없었으며, 사망 원인은 현재로선 확실하지 않다”며 “경찰이 조사 중”이라고 보도했다. 나카야마는 당초 이날 오사카에서 콘서트를 열 예정이었지만 건강 문제로 중단한 상태였다.

어릴 적엔 내성적인 성격에 친구도 별로 없었던 나카야마는 “사람들이 나한테 ‘캬~’ 하고 환호성을 질렀으면 좋겠다”며 ‘연예인 꿈’을 꾸던 초등학생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도쿄 하라주쿠에서 연예기획사에 스카우트됐다. 열다섯 살이던 1985년 싱글 앨범 ‘C’를 발표해 아이돌 가수로 데뷔했다. 첫 싱글은 17만 장이 팔렸고 그해 일본 레코드 대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1980년대 ‘아이돌 4대 천왕’ 중 한 명으로 불렸다.

아이돌 가수였던 나카야마에게 ‘러브레터’는 특별한 작품이었다. 1인 2역을 연기력으로 소화한 나카야마는 일본 요미우리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이전에도 드라마·영화에서 연기했지만 대부분 아이돌 이미지를 내세운 작품이었다”며 “아이돌 배우라는 선입견에서 벗어났고, 배우로서 큰 자신감을 얻었다”고 했다. 러브레터로 블루리본상·호치영화제·요코하마영화제·다카사키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1997년엔 영화 ‘도쿄일기’로 일본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가족사는 화려한 아이돌·여배우의 모습과는 달랐다. 2002년 영화감독 겸 ‘냉정과 열정 사이’ 등을 쓴 소설가, 음악가인 쓰지 히토나리와 결혼했다가 12년 만에 이혼했다. 당시 파경의 원인이 나카야마의 불륜으로 알려지면서 지탄을 받았지만 이후 말하기 어려운 속사정이 알려졌다. 쓰지는 화장을 즐기고 머리를 어깨까지 기르며 여성처럼 치장하는 걸 즐겼고 정상적인 부부 생활이 힘들었다. 이와 같은 ‘중성화(中性化)’ 현상을 참지 못한 나카야마는 먼저 서명한 이혼 신고서를 쓰지에게 건넨 뒤,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외아들의 친권은 남편이 가져갔다.

세 살 때 부모가 이혼해 엄마의 손에서 자랐고 엄마는 재혼했다. 나카야마는 에세이집에서 “엄마는 언제나 갑자기 이사 갔다. 마치 무엇인가에게서 도망치듯이. 나는 그때마다 친구들과 제대로 작별 인사도 못하고 떠나야 했다”고 썼다.

나카야마의 마지막 흔적은 사망 전날인 5일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이다. 설치 미술가 루이즈 부르주아 전시회를 다녀온 사진과 함께 ‘며칠 전 갔다 왔는데 사진 잘 못 찍어서 죄송해요. 2~3일간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고, 같이 간 친구하고만 이야기할 수 있었어요’라는 글을 썼다. 손수건에 자수로 문구를 새긴 루이즈 부르주아의 작품 사진이다. 문구는 이랬다. “나는 지옥을 갔다 왔다. 그리고 이 말은 해야겠다. 그곳은 멋진 곳이었다(I have been to hell and back. And let me tell you, it was wonderful).”

[도쿄=성호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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