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드러내는 MZ 집회
7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집회에 등장한 ‘전국 집에누워있기 연합’의 깃발. 이날 2030 집회 참가자들은 정치 구호가 아니라 자신의 관심사를 담은 다양한 깃발을 제작해 들고 나왔다./ 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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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사람들의 모임’ ‘푸바오의 행복을 바라는 모임’ ‘전국 혈당 스파이크 방지 협회’ ‘TK 장녀 연합’
‘12·3 비상계엄 사태’를 일으킨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 지난 7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엔 기상천외한 깃발이 나부꼈다. 2030 참가자들이 자신의 취미, 반려동물, 음식 등 관심사에 따라 집회에 참석한 것이다. ‘내향인’ ‘OTT 뭐 볼지 못 고르는 사람들 연합회’ ‘전국 뒤로 미루기 연합’ ‘직장인 점심메뉴 추천 조합’ 등을 비롯, ‘강아지 발냄새 연구회’ ‘나라가 평안해야 냥이도 평안하다’ 같은 반려동물 애호가들의 행렬도 뒤를 이었다. ‘전국 계란은 완숙 협회’ ‘전국 얼죽아 연합회’ ‘전국 삼각김밥 미식가 협회’ 같은 음식·다이어트 관련 동호인들도 깃발을 들고 나왔다.
이날 집회 참가자들은 “온갖 소셜미디어 계정이 화면 밖으로 걸어 나온 것 같다”고 했다. 집회 참가자 안모(26)씨는 “정치 집회라고 하면 폭력 시위를 일삼는 과격 노조나 운동권 단체가 먼저 떠올라서 참석이 꺼려졌는데,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이 모두 나온 것 같아서 마음이 편했다”고 했다. 실제 이날 집회엔 2030 젊은 참가자가 상당수였다. 20대 남녀 커플이나 대학 점퍼를 입고 나온 대학생들이 많았다.
2030세대는 자신이 좋아하는 K팝·뮤지컬 가사나 게임 홍보 문구·웹소설 제목을 집회 문구로 변형해 팻말에 써왔다. 유명 웹소설 제목을 변주한 ‘탄핵 못하면 죽는 병 걸림’, 힙합 서바이벌 ‘쇼미더머니’ 탈락 안내를 변형한 ‘윤석열씨는 대한민국과 함께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같은 문구나, 유명 드라마에서 등장한 대사 ‘사과해요 나한테’ 같은 문구도 눈에 띄었다. 대학생이나 직장인들은 ‘다음주 시험임’ ‘불안해서 집에서 게임도 못하겠다’ ‘웹 소설 작가, 마감하기도 급한데’ 같은 팻말을 들고 시험 공부나 게임, 소설 집필을 하기도 했다.
‘아이돌 팬덤’ 단위로 집회에 참가하는 모습도 화제였다. NCT, 라이즈 같은 그룹의 팬들이 저마다의 네트워크에서 “탄핵 집회에 나가자”며 무리를 지어 현장에 나왔다고 한다. 7일 집회 중간에 연단에 오른 석모(18)양은 “몬스타엑스 멤버가 라디오 방송 중에 계엄령을 전달한 최초의 아이돌”이라며 “제 가수가 이런 용기를 냈기 때문에 저도 용기를 내 이 자리에 섰다”고 했다. 집회 참가자들은 각자 들고 온 아이돌 응원봉을 흔들었다. 해가 진 뒤 여의도는 아이돌 콘서트장을 방불케하는 분위기였다.
‘K를 생각한다’ 저자 임명묵 작가는 본지 통화에서 “팬덤이 정치 참여를 자랑하며 소속감을 다졌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고 했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각종 ‘밈’을 생산하며 느슨한 연대감을 다져온 청년들이 계엄 사태 이후 실제 광장으로 나와 만나면서 감동을 느끼는 측면이 있다”고 했다. 한편으론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반대 촛불 집회, 2008년 광우병 집회,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촛불 집회 때 시위 참가가 ‘온라인 대세’였던 것과 비슷한 현상이라는 분석도 있다. 당시에도 유모차 부대나 생활 동호인들이 온라인에서 결집, 거리로 나와 재치 있는 구호를 외쳤다.
[김보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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