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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목)

한국전쟁 때 ‘부당 명령’ 거부한 문형순 서장이, 경찰 후배들 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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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때 예비검속자를 총살하라는 문서에 ‘부당함으로 불이행’이라고 적혀있다. 제주4·3평화기념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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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내란사태에 군·경의 동원에 따른 증언이 잇따르는 가운데 한국전쟁 시기인 1950년 8월 제주에서 예비검속자를 총살하라는 지시를 거부한 경찰이 눈길을 끈다.



정부가 2003년 펴낸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정부는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당일 오후 당시 치안국장 명의로 각 경찰국에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을 전화통신문으로 긴급 하달해 보도연맹원과 반정부 혐의자들에 대한 ‘예비검속’을 실시했다. 예비검속은 과거 좌익활동 등을 한 이들 가운데 범죄를 저지를만한 이들을 미리 구금하는 것이었지만 이와 무관한 공무원이나 교사, 부녀자 등도 대상이었다.



이어 같은 해 7월8일 계엄령이 선포됨에 따라 검찰과 경찰, 법원 조직 등은 군의 관할로 귀속돼 계엄사령관이 예비검속을 주관했다. 이에 따라 제주에서는 같은 해 6월 말부터 8월 초에 이르기까지 820여명을 검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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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 제주4·3평화기념관 제공


제주지역에서는 7월 말부터 8월 하순 사이 제주읍과 서귀포·모슬포 경찰서에 검속된 자들에 대한 계엄당국의 대대적인 집단 총살이 자행됐다. 당시 경찰서에 수감된 예비검속자에 대한 총살 명령 및 집행은 육군본부 정보국 방첩대(CIC)와 제주지역 계엄군인 해병대, 제주도경찰국에 의해 이뤄졌다. 모슬포경찰서 관할 섯알오름에서는 8월20일 250여명이 학살됐다.



성산포경찰서에서만은 달랐다. 당시 제주도 주둔 해병대 정보참모는 8월30일 성산포경찰서에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의뢰의 건’이라는 제목으로 “본도에 계엄령 실시 이후 현재까지 귀서에 예비구속 중인 디(D)급 및 시(C)급에서 총살 미집행자에 대하여는 귀서에서 총살 집행 후 그 결과를 내(來) 9월6일까지 육군본부 정보국 제주지구 CIC대장에게 보고하도록 의뢰함”이라는 문서를 보냈다. 성산포경찰서의 예비검속자 가운데는 디급 4명과 시급 76명이 있었다.



그러나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은 계엄군의 지시를 거부하고, 디급과 시급 80명 가운데 6명만 군에 넘겼다. 문 서장은 계엄군이 보낸 문서에 자필로 ‘부당함으로 미집행’이라고 적고, 군의 총살 지시를 거부해 220여명을 석방했다.



그는 모슬포서장 대리로 근무하던 1949년에도 좌익에 연루된 모슬포 주민들을 상대로 자수를 권유하고 극우 서북청년단의 개입을 막아 100여명의 주민을 지키기도 했다.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짐개동산에는 지난 2005년 7월 지역주민들이 그의 공을 기리는 공덕비를 세웠다.



문 서장은 일제 강점기인 1929년 4월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단체 국민부에서 중앙호위대장으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에도 가담했다. 1953년 경찰을 그만둔 그는 1966년 숨졌다.



경찰은 지난 2018년 8월 이런 그의 공로를 그려 ‘올해의 경찰 영웅’으로 선정하고, 제주경찰청에는 그의 흉상을 설치했다.



4·3 연구자는 “12·3 비상계엄 내란사태 당시 국회 상공에 헬기가 뜨고, 경찰이 국회를 봉쇄하는 모습을 보며 큰 충격을 받았다”며 “새삼 한국전쟁 시기 계엄군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고 예비검속된 주민들을 살려낸 문 서장의 행동이 생각났다. 문 서장은 당시 명령을 거부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던 상황에서 용기를 냈던 것이 아니겠냐. 지금쯤 후배들이 부끄럽다고 할 것 같다”고 말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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