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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0 (금)

베트남에서 '한국식 성공'은 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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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얼라이언스 주최로 지난 10월 31일 개최된 '아시아의 한국인 2024'에서 채승호 넥스트랜스 상무가 발표하고 있다. / 사진=스타트업얼라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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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서는 한국의 성공 경험을 잊으셔야 합니다. 현지인처럼 살면서 다시 창업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시작하세요."

10년간 베트남 시장에서 100여 개 기업에 투자해온 넥스트랜스 채승호 상무의 첫 마디는 의외로 냉정했다. 최근 스타트업얼라이언스가 주최한 '아시아의 한국인 2024' 강연에서 그는 베트남 진출을 준비하는 한국 기업인들에게 장밋빛 환상을 거두라고 조언했다.

인구 1억의 거대 시장, 40세 이하 인구 61%, 2024년 3분기 7.4%라는 경이로운 경제성장률. 숫자로만 보면 베트남은 기회의 땅이다. 하지만 현지 창업 현장의 이야기는 사뭇 다르다. 화려한 성장 지표 뒤에는 창업가들을 기다리는 냉혹한 현실이 있다.

"95년도의 한국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물가가 오르자 수세미 판매량이 30% 감소했습니다." 채 상무는 이 단순한 통계 하나로 베트남 시장의 민낯을 드러냈다. 인당 GDP 1,800달러. 이는 한국의 1995년 수준이다. IMF 외환위기 당시 '아나바다 운동'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들이 아직도 베트남 곳곳에서 목격된다.

"샴푸통을 반으로 잘라 끝까지 사용하던 그때로 돌아간 겁니다." 그의 말에는 베트남 소비자들의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생필품 하나를 사는 데도 신중하게 가격을 비교하고, 할인을 기다리는 소비자들. 한국의 1990년대 중반과 닮은 모습이다.

50% 할인이 아니면 지갑을 열지 않는다

소비 패턴은 더욱 충격적이다. "철수하기 한 달 전에 50% 할인 쿠폰을 뿌리지 않으면 고객이 다시 찾지 않습니다." 이커머스 시장의 현실이다. 소피(Shopee)가 50% 할인을 하면 다른 플랫폼들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후불제 문화는 또 다른 도전 과제다. 물건을 받아보고 확인한 후에야 결제하는 것이 당연시된다. "쇼피 사이트에는 '까서 확인'이라는 문구가 공식적으로 등장합니다. 정품 확인을 위해 포장을 뜯어볼 수 있다는 거죠."

반품률은 30-40%에 달한다. 총거래액(GMV)과 순거래액(NMV)의 차이가 크다는 얘기다. "GMV가 높다고 자랑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실제 NMV를 보면 전체의 80% 수준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반품 비용으로 사라져요." 한국의 이커머스 공식은 이곳에서 통하지 않는다.

돈 빌려주는 곳이 한 군데도 없다

자금 조달은 베트남 창업가들의 가장 큰 난관이다. 담보대출도 12-13%의 고금리다. 무담보 대출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자금을 해외에서 조달받습니다. 현지 금융시장이 미성숙하다 보니 창업 초기에 자금을 구하기가 매우 어렵죠."

인재 채용도 쉽지 않다. 영어 가능자는 월 800달러의 고임금을 요구한다. "영어 잘한다고 400달러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두 배를 부르더라고요." 현지 직원을 뽑으려면 경영자가 베트남어를 익혀야 한다. 언어 장벽이 또 하나의 진입 장벽이 되는 셈이다.

한남동과 단칸방 사이의 간극

"한국 주재원들의 생활수준과 절대 비교하지 마세요. 현지인처럼 살아야 합니다." 호치민 2군의 고급 주거지역 아스텔라 아파트는 마치 서울 한남동을 떠올리게 한다. 대기업 주재원들이 누리는 호화로운 생활. 자녀들의 국제학교 학비까지 회사가 지원한다.

하지만 이는 창업자들과는 무관한 세상이다. "보증금 2개월치를 현금으로 내야 하는데, 그 현금은 어디서 구하나요?" 현지 물가에 맞춰 살아야 하는 창업자들의 현실은 냉혹하다. "길거리 쌀국수로 끼니를 해결하고, 현지인들처럼 생활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베트남은 기회의 땅이다

위기 속에도 기회는 있다. 삼성디스플레이, 암코, 카스텍 등 글로벌 기업들의 제조시설 이전이 가속화되고 있다. 특히 중국에서 이전하는 반도체 관련 시설들이 눈에 띈다. "전 세계적으로 7% 이상의 경제성장률을 보이는 나라가 몇이나 있을까요?"

주요 5개 도시의 인당 GDP는 7,000달러를 넘어섰고, 3-4년 내 10,000달러 달성이 예상된다. "약 2,000만 명의 인구가 한국의 2000년대 중반 수준의 소득을 올리게 됩니다. 구매력을 갖춘 소비자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뜻이죠."

새로운 소비 트렌드도 주목할 만하다

출산율이 1.9명으로 낮아지면서 자녀 교육에 대한 투자가 증가하고 있다. "한 자녀를 더 잘 키우자는 분위기입니다." 에듀테크와 헬스케어 분야의 성장이 두드러진다. 소득 증가로 의료·건강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채 상무는 특히 반도체 관련 산업, 천연물 신약, 화장품, 메디컬 헬스케어, 농업 기술 분야를 유망 업종으로 꼽았다. "베트남은 천연물이 풍부한 나라입니다. 화장품이나 신약 개발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죠."

반면 이커머스나 핀테크는 조심스러워했다. "김범석 의장님과 경쟁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글로벌 성공 경험이 있는 현지 창업자들과 맞붙어야 합니다."

성공을 위한 네 가지 조건

채 상무는 성공을 위한 네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철저한 시장 조사다. "지불 의사가 있는 시장인지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체류비 정도만 들여 시장을 확인하고, 수요가 확실할 때 리소스를 투입하세요."

둘째, 창업자의 직접 진출이다. "직원에게 맡기면 실패합니다. 현지의 고충을 직접 겪어야 해결책도 찾을 수 있습니다."

셋째, 현지화된 비용 구조다. "한국 주재원들의 생활수준을 잊으세요. 현지인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현지 시장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5년을 버틸 수 있는 인내심이다. "처음 2년은 배우는 기간입니다. 그 후에야 진짜 사업이 시작됩니다. 단기 성과를 기대하면 실패합니다."

"베트남은 창업가에게 혹독한 시험대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5년을 버틸 수 있다면, 그때는 분명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겁니다." 채 상무의 마지막 조언에는 쓴맛과 단맛이 공존했다. 베트남이라는 시장은 그만큼 냉혹하면서도 매력적인 곳이다. 현지에서 다시 창업한다는 마음가짐. 그것이 이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글 : 손요한(russia@platu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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