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김상민 화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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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정치적 행위와 언론의 자유를 통제하겠다는 포고령 등은 우리가 배운 민주주의와는 전혀 맞지 않는 내용이었다 ... (중략) 선대로부터 이어받은 민주의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후대에 전달한 불꽃이 더 당당히 타오를 수 있도록, 연대의 촛불로서 지켜낼 것이다.
- 서울 은평구 A고교 시국선언문 중
지난 14일 서울 은평구 A고교 총학생회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에는 게시물이 하나 올라왔습니다. ‘우리는 침묵하지 않는다. 우리의 목소리가 미래에 닿기까지’라는 제목의 시국선언문으로, A고교 학생 168명이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러자 A고교 교장이 “학생 개개인이 탄핵을 반대하는 정치세력에게 공격받을 수 있다”며 실명을 내리라고 합니다. 개인 실명을 지운 뒤 총학생회 명의로 시국선언문을 SNS에 올리자, 이번에는 교장이 “정치관여금지 조항이 있는 학칙을 빌미로 외부에서 공격할 수 있으니 시국선언문을 내리도록 할 것”을 학생들에게 요구합니다. A고교는 학생회 측에 최대 퇴학까지 가능하도록 한 ‘정치관여금지’ 학칙의 존재를 알렸습니다. 학생들에겐 학교의 알림이 위협이 되었고, 시국선언문은 다시 SNS에서 내려갔습니다.
서울 은평구 A고교 학생들이 학생회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공개한 시국선언문. 독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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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사실이 SNS에 공유되고 언론 보도를 통해 확산되자 학교 측은 입장을 바꿔 현행 학교생활규칙이 잘못되었다고 인정했습니다. A고교 교장은 지난 19일 기자와 통화하면서 “서울시교육청 지침을 상세히 살펴보니 2022년 4월에 개정된 지침이 내려왔는데 그때 제대로 고치지 못했다. 현재는 규정이 잘못돼 있어서 완전히 삭제하고 다시 보완하기로 했다”고 했습니다.
A고교 측은 시국선언문 삭제 이슈가 불거지기 시작한 지난 16일에는 “2020년 학칙을 개정하면서 ‘정치관여행위 금지’는 유지하면서 ‘공직선거참여 제외’라는 단서를 붙였다”고 밝혔습니다. 이밖에 학생 선동을 한 자, 동맹휴학을 주동한 자를 최대 퇴학까지 가능하도록 규정한 조항은 그대로 놔뒀습니다. 앞서 2020년 선거연령이 만 19세에서 만 18세로 낮아지면서 서울시교육청은 학생들의 정치활동을 제한하는 학칙을 개정하라고 각 학교에 알린 바 있습니다.
A학교는 당시 꼼수에 가깝게 ‘공직선거참여 제외’라는 단서조항만 붙여 개정했다가, 이번 12·3 비상계엄 사태 국면에서 여론의 비판에 밀려 뒤늦게 개정에 나선 것으로 보입니다. 참정권이 주어졌는데 선거참여는 되고 정치 관여는 안 된다는 규정은 난센스에 가깝습니다. 선거 공보물만 보고 투표만 하라는 뜻인 것일까요.
게다가 2022년에는 법령 개정으로 정당 가입이 가능한 나이가 만 16세로 낮아지면서 대부분 고교생은 정당 활동이 가능해졌습니다. 정치관여금지 규정은 위법성이 큰 조항인 셈입니다.
학생들의 시국선언문을 내리게 한 조치 이면에는 A고교 교장의 개인적 견해가 반영된 것 아니냐는 의혹도 불거졌습니다. A고교 교장이 학교 누리집에 올려놓은 ‘시업식 훈화’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대한민국’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습니다. A고교 교장은 훈화에서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대통령의 독립 및 애국활동에 대하여서 알아보도록 하겠다”고 하면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장점 다섯가지를 정리해 나열합니다.
서울시교육청이 2020년 관할 고교에 학교생활규칙을 수정하라며 보낸 공문.(왼쪽) 서울 은평구 A고교가 서울시교육청 공문에 따라 수정한 학칙. 정치관여행위 옆 괄호 안에 ‘공직선거 참여 제외’가 쓰여 있다.(오른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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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글에는 ‘광복절’이 아니라 뉴라이트 계열이 주장하는 ‘건국절’ 표현이 녹아있는 반면 ‘독재’라는 단어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교장이 훈화를 읽은 시점은 22대 총선을 한 달여 앞두고 있었던 지난 3월4일입니다. A고교 교장은 지난 19일 “이승만의 부정선거는 가르치지 않아도 학생들이 다 알기 때문에 공과 중 ‘공’ 위주로 언급했던 측면이 있다”며 “(시점상) 부분적으로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게 됐고, 저는 태극기부대나 그런 쪽이 아니라 합리적 보수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A고교의 학교생활규칙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자 서울시교육청은 오는 23일 A고교에 학교생활규칙 개정 컨설팅을 하러 방문하다고 뒤늦게 밝혔습니다. 법령과 헌법이 보장한 정치 참여와 정치적 의사표현의 자유를 위반하는 조항이 있는지 살펴보는 절차라고 합니다. 서울시교육청은 또 내년 1월 서울에 있는 400여개 고교의 학생 정치활동 관련 학교생활규칙을 직접 전수조사한다고도 했습니다.
서울시교육청도 이번 사태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서울시교육청은 당초 A고교 조치에 개입하기 어렵다는 취지의 입장을 내놨습니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지난 16일 기자와 통화하면서 “개별 학교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긴 어렵다”, “전수조사하기엔 행정력에 한계가 있다”, “학교 측이 학생 정치참여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수정했다고 알려왔고 그렇게 알고 있었다”, “(A고교의 정치관여금지 조항이) 관점에 따라 문제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불과 2~3일 사이 서울시교육청의 움직임이 “전수조사를 하겠다”며 달라진 것입니다. 서울시교육청은 2020년, 2022년과 올해 정치관여금지 규정을 개정해 달라는 공문만 보내고, 해당 학교가 “개정했다”고 알리면 그대로 수용하는 형태로 업무를 해왔다고 합니다. 위법소지가 큰 학교생활규칙을 방치하는 데 일조한 셈입니다.
교육청과 학교 모두 구시대적 생활규칙으로 학생들의 정치 참여를 막아선 학교의 조치에 비판이 쏟아지자 등떠밀리듯 대응에 나선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운 대목입니다. A고교 학생들은 학교 교무실에 팩스를 보내 학교생활규칙 개정을 요구했고, 학부모와 졸업생들 또한 교무실에 항의 전화를 쉴새 없이 걸어왔다고 합니다.
A고교 측은 “현재 규정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어서 모두 삭제할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또 학내 의견 수렴, 학교운영위원회 등을 거쳐 학교생활규칙 개정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마치겠다고도 했습니다.
☞ ‘계엄사태 비판’ 시국선언문 막은 학칙 “선거참여만 되고 정치관여 안 된다”고요?
https://www.khan.co.kr/article/202412161612001
김원진 기자 one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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