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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8 (토)

자살 계획한 친구의 ‘부서진 마음’이 던지는 질문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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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성공이나 자긍심이 아니라 실패와 수치심으로 세계를 지을 수 있다면. 마음의 손상, 혹은 부서진 마음이 세계에 질문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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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편하고도 감정이 덜컹거리는 책을 읽어내기 위해 300여쪽 분량의 텍스트를 마무리하며 저자가 남긴 문장 몇 개를 손잡이처럼 붙잡았다.



“나는 우리의 수치심으로부터 세계의 진실이 드러날 것이라고 믿는다. 성공이나 자긍심이 아니라 실패와 수치심으로 세계를 지을 수 있다면. 마음의 손상, 혹은 부서진 마음이 세계에 질문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면.”



책 ‘증명과 변명’은 저자가 친구와 나눈 대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친구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동기이자 책을 쓰게 된 동기는 독특하다 못해 난처하다. 친구인데 “머지않은 시일 내에 죽음을 계획해둔 오래된 친구”의 “죽음을 막기 위”해 저자는 인터뷰를 시도한다. “자신의 이야기가 사람들이 공감할 만하고 읽을 만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계획에 약간의 변화라도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책을 쓴다. 부제가 ‘죽음을 계획한 어느 청년 남성이 남기는 질문들’이다.



저자 안희제는 자신의 크론병과 싸우며 질병과 장애, 정상성과 비정상성, 차별과 소수자 등의 주제로 세계를 읽어 왔다. ‘난치의 상상력’과 ‘망설이는 사랑’ 등의 책을 썼다. 그와 우진(가명)은 1995년생 동갑이자 같은 중학교를 졸업한 십년지기다. 우진에게 희제는 ‘대나무숲’과 같은 존재다. 가족이나 다른 지인들에겐 하지 못하는 이야기(돈과 여자 등)를 마음 편히 한다.



희제는 올해 1월 ‘폭탄 목걸이’라 이름 붙인 우진의 “자살 유예 계획”을 듣는다. 온라인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에 등장하는 ‘폭탄 목걸이’는 죽기 직전의 캐릭터가 사용할 경우 정해진 시간 안에 적을 처치하면 한 차례 살 기회를 얻는 ‘긴급구제’ 기술이다. 자살 날짜까지 정해둔 우진이 죽음을 철회하는 조건으로 붙든 ‘폭탄 목걸이’는 ‘코딩을 공부해서 구상하고 있는 프로그램을 특정 날짜까지 만드는 것’이다.



‘대입-연애-군대-취업-결혼’이란 “케이(K) 타임라인”에서 탈락해 우울과 강박, 열등감에 시달리는 ‘청년 남성’ 우진의 서사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하나의 표상과도 같다. 수능 6수, 대학 자퇴, 주식 투자, 코딩 공부로 이어지는 실패와 좌절의 이야기는 사회적 소수자의 대척점에서 ‘정상 시민’의 역할을 부여받지만 폭력과 성 착취의 가해자가 되거나 ‘젠더 갈라치기’ 정치에 동원돼온 남성들의 서사와 완벽하게 떼어놓기 어렵다. 목표한 성취에 이르지 못한 좌절로 자살하는 남자와 난데없는 무차별 범죄로 목숨을 잃는 여성들의 죽음을 마주놓을 수 없다는 ‘불편한 시선’을 저자도 의식한다. 성공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고 실패에 대해선 상대적 약자에게서 ‘변명’의 출구를 찾는 ‘정형화된 남성’을 위한 정당화 시도가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나는 한국 청년 남성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뻔하게 여겨지고, 동시에 청년 남성 본인들에게도 별다른 가치가 없다고 여겨진다는 바로 그 지점에 주목하고 싶다.”



저자는 “기괴할 만큼 비슷해 보이는” 남성들의 이야기와 “뻔한 것을 뻔하게 만드는 과정들을 뜯어봐야 한다”고 말한다. 모태 솔로로서 강박적 ‘번따’(번호 따기), 우울이 시작된 수험 생활, 열등감과 대학 자퇴, 주식을 통한 자기 증명 등에 대한 대화는 희제를 ‘우진의 불 꺼진 방’과 ‘우진도 모르는 우진의 방’으로 이끈다.



한겨레

증명과 변명 안희제 지음, 다다서재, 1만8000원


희제는 우진이란 ‘곤란한 텍스트’를 읽기 위해 문화인류학, 사회학, 철학, 정신분석학, 퀴어 이론 등 그가 “배운 (모든) 것들을 동원”한다. 그에겐 “사회를 이해하고 바꾸기 위해 우진의 이야기가 필요하다기보다 우진을 이해하고 그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 사회가 필요”했다.



저자가 친구의 ‘부서진 마음’을 통해 이 세계에 던지는 질문들이 그 과정에서 드러난다. 끊임없이 탈락자를 만들어내는 사회에서 최종 승자는 과연 존재하는가.(“우진은 수능에 대한 기억을 되짚는 것이 물에 잠긴 지하실을 더듬거리는 과정과도 같다고 표현했다.”) 유예된 행복은 언제 현실이 되나.(“실체 없는 행복은 연애나 여행과 같은 모양을 하고서는 계속 지연되고 약속된다.”) 좌절은 어떻게 약자를 향한 대상화와 공격으로 뒤바뀌나.(“우진 자신의 성적 매력에 대한 체념이 우울로, 이 우울을 통제하기 위한 ‘번따’라는 강박이 여성의 비인격화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누구의 잘못인가.(“시험 사회는 질문과 성찰을 차단하고, 실패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게 만들며, 시험 실패를 개인의 능력 자체에 대한 부정이나 망각으로 연결한다.”)



“내 잘못이라고 생각해. 내 잘못이야. 그냥 내 잘못인 거야. 내 잘못이야. 내 잘못이라고 생각해.”



대화 내내 우진이 가장 많이 한 말이었다는 “내 잘못”은 결국 그의 자살 결심에까지 가닿는다. 그렇다면 우진은 지금 살아 있을까. “자신이 목표를 이루지 못할 경우 이것(책)이 자신에게 유작이 될 것”이라는 친구에게 희제는 “어떠한 경우에도 생사를 밝히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그 친구를 읽고 쓰는 언어가 단정적이거나 규정적일 순 없다. 저자가 글을 쓰는 태도이자 독자가 공유해주길 바라는 태도는 ‘망설임’이다. 각 장의 시작과 끝에 ‘○장에 앞서’(그 장을 쓰는 이유와 맥락 부연)와 ‘○장에 부쳐’란 장치를 둔 것도 그래서다. 특히 ‘○장에 부쳐’는 ‘글쓰기의 폭력’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우진에게 부여한 일종의 ‘반론 지면’이다. 망설임으로 쓴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다시 질문한다.



“좋은 남자, 멋있는 남자, 매력적인 남자가 되고 싶다는 우진의 마음”이 “왜 ‘난 죽으려고 해’로 바뀔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대체 어째서?”



그는 “내 친구를 죽이고 있”는 “책임 전가의 연쇄” 구조에 책임을 묻는다.



“정치는 소수자에 대한 폭력을 남성들에게 외주 준다. 하청을 받은 남성들은 폭력에서 느끼는 죄책감을 자기들 안의 다른 누군가에게 외주 준다. 책임이 계속해서 전가되면서 책임감의 무게는 불어난다. 그것은 차곡차곡 쌓이며 다른 누군가에게 흘러간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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