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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1 (수)

[조용헌 살롱] [1476] 命課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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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종6품 벼슬이었다. ‘경국대전’에 보면 중인들이 응시했던 잡과(雜科) 과목에 명과학(命課學)이 있었다. 사주팔자 전문가를 뽑는 과목이었다. 3년마다 뽑았는데 그 인원은 적어서 2~3명 정도 뽑았다. 여기에서 선발된 명과학교수들은 왕실 전용이었다.

왕실의 공주나 왕자 혼사를 할 때 궁합을 봐주고 결혼 날짜를 택일하거나, 궁궐의 상량식 날짜를 택일하는 업무였다. 직급도 낮고 중인들이었으므로 별 볼일 없는 자리같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왕실 내부의 일급 비밀들을 다루는 자리였다.

여러 명의 왕자 중에서 누가 차기 대권을 승계받을 가능성이 높은 팔자인가? 왕자, 공주의 결혼 상대자 팔자를 심사하고 천거하는 일은 권력의 향배와 아주 밀접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궐에서 일하던 어의(御醫·한의사)는 퇴직하면 시중에서도 개업이 가능하였지만 명과학교수는 퇴직해도 민간에서 개업이 불가능하였다. 왕실 비밀을 너무 알고 있었다.

조선 시대 각종 반란 사건 기록을 보면 이 명리학전문가가 관련되어 처벌받는 경우가 흔하였다. 어느 왕자에게 줄을 서야 하는가에 대한 일급 정보는 대부분 이 명리학전문가들로부터 누설되었다. 명리학전문가가 되려면 공부할 게 많았다.

교과서가 되는 순한문의 ‘서자평(徐子平·명리학의 교과서)’ 정도는 거의 외워야만 하였다. 거기에다 실전 경험까지. 고위직 벼슬이 봉쇄되어 있었던 이북 사람들에게 이 분야가 인기 있었던 것 같다. 조선 시대 이북은 차별을 받아서 중간 이상급의 벼슬 진출이 불가능하였다. ‘서북 차별’이 이것이다. 고위직에 못 가니까 실용적인 중인 과목으로 인재들이 몰렸다. 명리학, 한의학, 풍수지리 분야이다. 조선 시대 이래로 명리학의 전문 선수들은 이북 사람들이 많았다. 한의학도 마찬가지이다.

현대에 ‘사주첩경(四柱捷徑)’(1970)이란 명저를 남긴 이석영(1920~1983)도 이북 출신이다. ‘사상의학’의 이제마도 함경도 출신이다. 이남에서는 그림으로 보는 구구단 수준의 당사주(唐四柱)가 유행하였다면 이북은 인수분해 수준의 차원 높은 명리학이 유행하였다. 해방이 되고 이북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면서 명리학 하는 사람들은 숙청 대상이 되었다. 일은 안 하고 놀고 먹는 ‘미신 종사업자’로 규정하였다.

6·25가 터지자 부산 영도다리 밑으로 집결하였다. 이북의 명과학 고단자들이 부산에 집결하게 된 역사적 계기였다. 부산이 한국 역술계의 메카가 된 이유이다. 이후로 이 분야의 프로가 되려면 반드시 부산에 가서 ‘도장 깨기’를 겪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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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컨텐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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