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심리학으로 보면 잠재적 위협 포착하려는 본능의 작동… 쉽게 안 없어져
미 의사당 폭동·이번 계엄 사태 등 ‘부정선거 음모론’ 뒤에서 작동
음모론자 악인·바보로 몰면 안 돼
그들의 불안·분노 먼저 인정하고 극단 유튜브 줄이도록 설득을
이런 음모론들을 믿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놀랍게도 전 세계적으로 수천만 명에 달한다. 미국의 회의주의자 연구 센터가 실시한 조사(2021년, 미국인 3139인)에 따르면 9·11 테러 음모론을 믿는 사람은 미국인의 25%, 오바마 출생 음모론자는 21%, 심지어 파충류 외계인 음모론자도 12%나 된다. 미국인의 절반 이상이 “하나 이상의 음모론을 진지하게 믿은 적이 있다”고 답한 조사도 있다.
단지 믿기만 한 것도 아니다. 2016년 미국의 한 피자 가게에 총기 사건이 발생했는데, 범인은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이 그 가게의 지하실에서 아동 성매매 조직을 운영한다는 가짜 뉴스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2017년 미국에서 발흥한 ‘큐어논(QAnon)’이라는 극우 음모론 집단은 미국의 주요 시스템을 장악한 그림자 권력 집단 ‘딥 스테이트’가 존재하며 그것이 민주당, 주류 언론, 주요 인사들에 의해 운영된다고 주장해 왔다. 급기야 2021년 1월 6일에는 일부 큐어논 지지자들이 미국 의사당 폭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선거가 도난당했다”는 트럼프의 주장에 동조했다. 훗날 이 사건은 음모론의 실행이 민주주의에 얼마나 큰 해악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뼈아픈 사례로 남았다.
물론 음모론이 보수 진영의 뇌만 잠식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911 테러 음모론이나 유대인의 미국 비밀 통제 음모론의 경우 민주당 지지자가 더 많다. 연구에 따르면 음모론자는 성별, 나이, 인종, 소득, 정치 성향, 직업상 지위와 크게 상관이 없는데, 교육 수준만큼은 음모론 수용 여부에 영향을 준다. 가령 미국의 경우 고졸 이하는 42%가 음모론을 수용하지만, 석사는 22% 정도만 받아들인다. 석사 10명 중 2명은 음모론자라는 말인데, 음모론과 절연이라도 하려면 박사 학위마저 필요하다는 뜻일까?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다. 달리 말해, 음모론은 의식적으로 애를 써야만 겨우 떨쳐낼 수 있는 낡은 사고 습관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오래된 심리를 연구하는 진화심리학에서는 음모론이 끈질긴 이유를 오류 관리 이론으로 설명한다. 우리 조상들에게는 위험을 과소평가하는 것보다 과대평가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다. 가령, 정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단순히 바람 소리로 착각했다가 포식자에게 잡아먹히는 것보다, 맹수가 있다고 판단하고 도망가는 것이 훨씬 안전한 전략이었다. 이런 생존 전략은 ‘잠재적 위협 시나리오’를 과도하게 탐지하는 방식으로 오늘날도 작동한다. 가령,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는 믿음은 만에 하나 실제로 그런 세력이 존재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한 과잉 반응일 수 있다.
음모론은 통제감에 대한 갈망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사회가 복잡하고 불확실성이 클수록 “이 모든 것은 누군가의 의도적 조작”이라는 음모론은 단순하지만 선명한 해답을 제공한다. 대형 참사가 발생했을 때 배후 세력의 존재를 주장하는 음모론은 사건 결과를 수용하기 어려운 보통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재빨리 파고든다. 심리적 안정감을 주기는 사주, 점, 관상 등도 마찬가지다. 운명이라는 틀 안에서 세상을 이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음모론은 집단성을 띤다. 사회적 종인 인류에게는 누가 배신하거나 몰래 이익을 취하는지를 감시하는 행위가 매우 중요했다. 이로 인해 인간은 “누군가 우리를 속이고 있다”는 시나리오에 지나치게 민감하다. 이런 경향은 대개 외(外)집단에 대한 경계심으로 나타난다. 집단의 관점에서 음모론의 기능은 또 있다. 음모론자는 자신들을 종종 ‘진실을 아는 소수’로 간주하며 강한 집단 정체성을 형성한다. 게다가 지금의 소셜미디어는 이런 정체성을 증폭하고 있다. 이런 우월적 소속감은 음모론을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행동의 동력으로 전환시킨다.
물론 누구에게나 음모론적 성향이 진화했다고 해서 음모론이 정당화된다는 뜻은 아니다. 자연스러움과 올바름에는 늘 거대한 간극이 있다. 실제로 음모론은 단순히 개인의 잘못된 믿음을 넘어 사회적 분열을 초래하고 때로는 폭력적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2021년 미국 의사당 폭동에서 2024년 한국의 12·3 계엄령 선포까지, 배후의 힘으로 작용한 ‘부정선거 음모론’은 사실관계를 왜곡하고 공적 담론을 오염시키며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인 대화와 신뢰를 무너뜨렸다.
그렇다면 음모론에 이미 깊이 빠져 있는 동료를 구할 방법은 무엇일까? 두 가지 팁. 음모론 치료 연구에 따르면 우선 그들을 악인이나 바보로 몰아붙여서는 안된다. 그들이 느끼는 불안과 분노를 먼저 인정하면서 설득해야 한다(그래서 너무 어려운 작업이다). 낙인을 찍고 비난하면 오히려 음모론이 더 강해지는 역효과가 발생한다. 둘째, 극우나 극좌 방송 채널 시청부터 줄이게 하고 추천 알고리즘과 무한 스크롤에 의탁하지 않도록 도와줘야 한다.
음모론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잠재적 위협을 포착하려는 본능의 작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본성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는 음모론의 폭주로 인해 발생하는 국가 시스템의 훼손을 제대로 막기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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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익 장대익 가천대학교 창업대학 석좌교수·진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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