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오후 광화문에서 열린 ‘자유 대한민국 수호 국민혁명대회’에서 참석자들이 탄핵 반대 구호를 외치고 있다. 부정선거 음모론 등 가짜 뉴스가 ‘대안적 사실’로 받아들여지면서 정치적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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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대학 출판부는 ‘올해의 단어’로 ‘뇌썩음(brain rot)’을 선정했다. 자극적인 쇼트 폼 콘텐츠를 과잉소비해 집중력 저하, 문해력 약화 등 지적 퇴화가 심각해지는 현상을 꼬집은 단어다.
내란죄 피의자 윤석열 대통령이 평소 극우 유튜브에 중독됐고, 선거해킹 등 부정선거 음모론에 심취했다는 사실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소셜미디어 중독에 의한 ‘뇌 썩음’이 민주주의를 뿌리째 흔들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극우 유튜브 중독과 음모론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매년 사회상을 반영해 그해를 대표할 만한 단어를 선정한다. 2016년에 선정한 ‘탈진실’은 트럼프 당선과 브렉시트라는 세계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을 이해하는 열쇳말로 주목을 받았다.
올해의 단어로 선정된 ‘뇌 썩음’은 1854년 미국의 생태주의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에서 처음 등장했다가 지난 1년간 사용 빈도가 230%나 늘어났다. 소로는 영국 시민들이 복잡한 사고를 거부하고 정신적으로 퇴보하고 있다며, “영국은 썩은 감자(potato rot)을 해결하려고 그토록 노력하면서 왜 ‘뇌 썩음’은 치료하려 하지 않는가”라고 꼬집었다.
부정선거 음모론을 주장하는 구독자 113만의 유명 극우 유튜브 ‘고성국 TV’. 유튜브 갈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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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청소년들의 소셜미디어 중독을 경고하는 의미로 사용된 ‘뇌 썩음’은 극우 유튜브 중독과 음모론에 포획된 윤석열 대통령의 망상과 비정상 행태를 이해하는 열쇳말로도 관심을 모은다. 취임식 초청, 핵심 요직 발탁 등 극우 유튜버들과의 친밀함은 여러 경로로 확인된다. 계엄 선포 담화에 ‘나라를 망치려는 반국가세력’ ‘데이터 조작’ 등 극우 유튜브에 등장하는 표현을 사용해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김진표 전 국회의장은 지난 6월 펴낸 회고록을 통해 이태원 참사 조작론 등 극우 유튜버 방송에서 나오는 음모론을 대통령에게 직접 들었다면서 우려를 표한 바 있다.
음모론에 사로잡힌 이유
윤 대통령은 왜 극우 음모론에 빠져들었을까? 지지율 하락과 총선 패배, 기성 언론이 쏟아내는 비판에 직면해, 현실을 부정하는 방편으로 유튜브와 같은 소셜미디어에 빠져들었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미국의 트럼프도 기성 언론의 거센 비판에 ‘가짜 뉴스’라고 맞섰다.
두 대통령이 부정선거 음모론을 신봉하며 체제의 정당성을 부정했다는 점도 비슷하다. 트럼프는 선거 불복 이유로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2021년 1월 6일 미국 의사당을 점거하도록 사주했고, 윤 대통령은 부정선거 음모론을 내세우며 12·3 내란을 자행했다.
신념 형성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 여부가 아니라 정체성이라는 점은 배웠다는 사람도 음모론에 빠지는 이유를 설명하는 중요한 열쇠다. 제프리 코헨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이 지난 10월 ‘실험 심리학 저널’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학력이 높은 사람도 뉴스를 판단할 때 정보의 정확성보다 ‘자신의 믿음’을 우선시했다. 사안을 판단하는 데 정보가 자신의 믿음과 일치하는지가 정보의 정확성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치며, 정치적 스펙트럼, 교육 수준, 추론 능력과 관계없이 동일하게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소셜미디어의 자동 추천 알고리즘의 역할은 결정적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게 하고 자신의 신념 체계와 맞지 않는 정보는 외면하도록 해 ‘확증편향’을 강화한다.
과학철학자 리 매킨타이어에 따르면 음모론은 “어떤 악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활동하는 악의 세력에 관한 이론”이다. “추측을 기반으로 하는 경우가 많고 증거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음모론은 과학부정론과 겹친다. 유튜브는 음모론의 진원지다. 음모론의 끝판왕으로 불리는 ‘지구 평평론자’들을 참여관찰한 연구에 따르면, 이들은 대개 유튜브를 통해 음모론에 심취했다. 리 매킨타이어는 반지성주의 태도 못지않게 “과한 자신감과 자기애, 낮은 자존감, 과도한 직감 의존도 음모론과 깊은 관련이 있다”면서 “어떤 사람들에게 음모론은 거대하고 감당하기 힘든 사건에 직면했을 때 통제력 상실과 불안에 대처하는 일종의 대응체계로 작동한다”고 말했다.
‘대안적 사실’과 탈진실
선관위에 대한 북한의 해킹 공격, 부정선거 음모론 등 내란죄 피의자 윤 대통령이 쏟아내는 말은 명백한 허구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논란을 연상시킨다. 2017년 1월 취임식 참석 인파가 2009년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대비 매우 적은 사진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자 숀 스파이서 백악관 대변인이 “역대 최대 인파”라며 사실과 다른 내용을 발표했고 쏟아지는 비판에 대해 ‘대안적 사실’이라고 받아쳤다.
대다수 시민은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을 ‘가짜뉴스’로 여기지만, 신념·세계관이 비슷한 10~15%의 지지자들에겐 ‘대안적 사실’로 간주될 가능성도 적잖다. 명백한 사실조차 당파적 문제나 논쟁으로 만들어 갈등을 증폭시키고 내전에 가까운 아수라장을 만들려는 정치적 의도가 숨어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은 없으며 저마다의 진실이 있을 뿐이라는 ‘탈진실’ 현상과 소셜 미디어 중독으로 인한 ‘뇌 썩음’은 ‘사실성’을 부정하고 사회적 합의 가능성을 외면해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한다.
한귀영 사람과디지털연구소 연구위원 hgy421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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