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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4 (토)

[김광호 칼럼] 보수의 적(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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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 인근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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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윤석열의 몰락은 ‘보수의 멸족’이 될 것인가. 윤석열의 민주공화국 파괴 망동 이후 보수가 겪는 처절한 혼란은 모두 이 두려움에서 시작된다. 당초 ‘계륵’과도 같았던 좌충우돌 권력자는 보수의 발목을 꽉 잡아채는 모래수렁이 된 것 같다.

지난해 11월7일 ‘명태균 게이트’로 궁지에 몰린 윤석열의 대국민 사과 담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임기’에 관한 것이었다. 담화문을 마지못한 듯 읽어가던 그는 유독 한 대목에서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저는 2027년 5월9일, 제 임기를 마치는 그날까지, 모든 힘을 쏟아 일을 하겠습니다.” 그러고 한 달도 안 돼 자폭적 비상계엄이라니, 임기를 지킬 수단은 이 분열증적 도박을 말하는 것이었나. 야당의 국정 방해를 핑계 댔지만, 자신과 부인의 ‘비리 방탄’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국회의 탄핵 이후 계엄을 통치행위라 강변하고, 수사를 거부하며 “국민과 함께 끝까지 싸우겠다”는 정신착란 수준의 버티기는 당연한 선택이었을 터다. 도대체 이 비극적인 맷집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보수의 복잡한 심사를 철석같이 믿고라도 있는 것인가. 비상계엄의 그 밤 이후 보수는 세 유형으로 갈라지는 듯하다. 전광훈류 극우의 ‘현실 부정’ 세력과 감춰뒀던 독재의 DNA를 커밍아웃하며 극우를 오가는 ‘기회주의 보수’, 그리고 보수 구명에 나선 ‘시민으로서의 보수’다.

우리 사회 10% 안팎으로 추정되는 ‘전광훈들’은 충격적이다. 시민이 총구 앞에 놓이고, 심지어 희생될 수 있었음에도 “계엄령 만세”를 외치고, ‘윤석열을 지켜라’ 아우성치는 그들과 같은 시공간을 나눈다는 게 섬찟하다. 온갖 패악질로 해방 공간을 피로 물들인 서북청년단을 떠올린다면 과도한 것일까. 어느 보수 논객은 ‘미치광이를 싸고도는 미치광이’라고 분노하지만, 그래서 더 두렵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괴물로 만들었을까. 이들은 박근혜 탄핵 학습효과를 이야기한다.

실상 과거도 현재도 더 심각하게 공화국을 위험에 빠트리는 건 기회주의 보수들이다. 계엄이 잘못이라면서도 “경솔한 한밤중의 해프닝”일 뿐이니 탄핵은 안 된다 하고, 향후 권력 향배와 결부 지으며 당면한 국가 위기엔 눈감는다. 계엄에 공동책임을 져야 할 친윤 패거리와 정부 내 잔존 인사들, 그리고 시간의 흐름 속에 ‘저질 양비론’으로 본색을 드러내는 무리들이다. 10% 보수가 극우 괴물이 된 것도 끊임없이 정치혐오를 부추겨온 이들과 무관치 않다. 윤석열의 계엄이 극단적 ‘정치 양극화’의 결과물처럼 호도하며 민주주의의 죽음을 주장하는 위선에 이르러선 헛웃음만 나온다. 바로 자신들이 ‘양극화된 진영’ 한가운데서 기생하며 정치의 타락을 부추겨왔음을 왜 모르는가. 그들이 윤석열의 숱한 비정상 행태에 단 한번만이라도 제대로 경고했다면 무도한 계엄은 없었을 것이다.

기회주의 보수들은 윤석열을 이용은 했지만 존중하지는 않았다. 계엄 이후 국민의힘 의원들과 통화하며 느낀 감정은 ‘멸시’였다. 혀를 끌끌 차는 한숨과 윤석열을 향한 “업둥이” 모멸은 친윤이라고 덜하지 않았다. 제 편조차 뒤돌아 조소했으니 그가 분열증적 ‘광탈’(광속 궤도이탈)에 이르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이제와 권력의 화양연화는 끝났다는 낭패감에 ‘심판의 시간’을 미루려 안간힘을 써보지만 허망한 일이다. ‘가치’를 말하지 않고, 업둥이든 뭐든 상관없이 권력만 탐했을 때 예견된 운명이다.

보수에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계엄의 어둠 속에서도 보수가 가야 할 길을 밝힌 ‘불씨’들을 본다. “지금 국회에서 막지 못하면 국민들이 피를 흘릴 수 있다는 생각에 앞도 뒤도 보지 않고”(김상욱) 계엄 해제에 나서고, “제가 대리해야 하는 시민들을 대신해 당연히”(김예지) 탄핵안 표결에 들어가 시민의 곁을 지킨 이들이다. 자신들이 만든 대통령을 끌어내려야 하는 참담함에 그들도 번뇌했을 테지만, 정치인 이전에 공화국 시민의 의무에 투철했기에 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김상욱은 “보수를 버리지 말아달라”고 한다. 국민이 보수를 버리는 게 아니다. 보수 스스로 몰락을 선택하는 것이다. 8년 전 박근혜 탄핵의 강을 온전히 건너지 못하고 보수 변화의 싹을 모조리 자른 결과가 오늘의 ‘윤석열 참사’일 것이다. 보수의 적(敵)은 보수 안에 있다. 이 혼란 와중에 또 다른 업둥이를 꿈꾸며 기웃거리는 자, 업둥이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무리들부터 멀리해야 한다. 주권자로서 보수는 선택해야 한다. 공화국 국민이 될 것인지, 공화국 파괴자가 될 것인지. 진짜 보수라면 멸족이 아니라 나라를 걱정해야 한다.

경향신문

김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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