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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5 (일)

범고래가 윤석열에게 가르쳐 준 것 [남종영의 인간의 그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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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어미 ‘탈레쿠아’와 함께 있는 아기 범고래. 고래연구센터 페이스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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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종영 | 카이스트 인류세연구센터 객원연구위원



2018년 여름 범고래 ‘탈레쿠아’가 새끼를 낳았다. 지난번에 유산한 터라 탈레쿠아는 더욱 기뻤을 것이다. 야생 범고래 무리를 지켜보던 과학자들도 기뻐하며 현장 조사를 나갔다. 그런데 탈레쿠아의 행동이 이상했다. 조막만 한 새끼는 자꾸 물속으로 가라앉았고, 어미는 부리와 머리로 새끼를 들어 올렸다.



새끼는 죽어 있었다. 어미는 들어 올렸다. 가라앉지 마, 가라앉지 마. 어미의 뜻을 알아차린 과학자들은 길을 비켜주었다. 사실 범고래의 이런 행동은 고래 연구자들 사이에서 낯설지 않다. 죽은 이를 떠나보내지 못하는 전형적인 애도 행동이다. 가까이는 제주도에 사는 남방큰돌고래 무리에서도 이 같은 행동이 목격된다.



그것으로 끝났다면 동물행동학 교과서를 확인한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튿날에도 탈레쿠아는 계속해서 죽은 새끼를 들어 올리며 50㎞ 넘게 헤엄쳤다. 나흘째에도 탈레쿠아는 새끼를 버리지 않았다.



그런데, 죽은 새끼 옆에 어미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같은 무리의 동료 범고래들이 탈레쿠아의 뒤를 따라 비탄과 슬픔의 여행을 함께하며 애도했다. 평소 사냥하고 놀고 사랑하는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 세일리시해의 섬을 돌았다. 닷새가 지나고 엿새가 지났다. 죽은 새끼의 몸이 썩기 시작했다.



과학자들은 궁금해졌다. 탈레쿠아는 물고기 사냥을 언제 하지? 이 불쌍한 어미는 굶어 죽지 않을까?



탈레쿠아가 죽은 새끼를 놓지 않고 계속한 슬픔의 항해는 다른 동료들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다. 유추해 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간혹 탈레쿠아가 죽은 새끼를 데리고 다니지 않는 장면도 발견된 것이다. 동료들이 새끼를 들어 올리는 고된 노동을 대신한 것으로 보였다. 그때 탈레쿠아는 허기진 배를 채웠을 것이다. 동료들이 먹이를 구해 주기도 했을 것이다.



가장 긴 범고래의 장례식이었다. 가족을 잃은 어미의 비통과 낙망에 모두가 힘든 여정을 함께했다. 탈레쿠아와 범고래들은 1600㎞ 이상을 헤엄친 17일이 지나고서야 새끼를 저세상으로 보낼 수 있었다. 다행히 건강 쇠약의 징후는 어미에게 없었다. 동료들이 도왔기 때문이리라.



지난 29일 제주항공 여객기가 전남 무안공항에서 동체 착륙 뒤 폭발해 179명이 숨졌다. 2000년대 이후 국내 최악의 항공 사고였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은 “일주일간 국가애도기간으로 정해 희생자에 대한 조의와 애도를 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12월3일 발발해 꺼지지 않는 내란 사태에 불안해하던 사람들은 거대한 슬픔의 파도마저 견디게 되었다.



이 와중에 그간 수사기관에서 보낸 서류조차 받지 않던 내란 사태의 피의자 윤석열 대통령이 페이스북에 나타나 “애통하고 참담한 심정”이라며 “이 어려운 상황을 하루빨리 극복할 수 있도록 국민 여러분과 함께 하겠다”고 했다. 자신의 복권을 노리고 정치세력을 규합하기 위한 뻔한 노림수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크게 성내지 않았다. 그들이 옳아서가 아니라 애도의 무거움을 깨지 않는 게 예의이기 때문이다.



헌법재판관 임명은 협상 대상이 아니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은 3명 중 2명만 임명한 행위를 철회하고 3명 모두 임명해야 한다. 윤석열 피의자와 대통령실, 대통령경호처는 형법이 규정하는 대로 체포영장 집행에 응해야 한다. 국가애도기간을 핑계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건 피해자의 불행과 대중의 슬픔을 이용하는 비겁한 짓이다.



2024년 12월은 환경 글을 쓰고 있어 상대적으로 ‘정치 저관여층’인 나에게도 가장 잔인한 달이었다. 자신과 다르더라도 동료로 대하는 것, 진심으로 애도하는 것, 헌법에 규정된 의무를 다하여 일상을 지속하는 것. 그조차 하지 않는 이들이 너무 많았다.



탈레쿠아는 어떻게 됐을까? 긴 장례식은 끝나고 범고래들은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사냥하고 놀고 사랑했다. 장례 기간 서로 확인한 부조와 신뢰로 사회적 연대는 더욱 공고해졌을 것이다. 지난 세밑에는 탈레쿠아가 새로 새끼를 낳은 게 확인됐다고 한다. 2025년에는 제발 좋은 소식이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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