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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5 (일)

[에스프레소] 쿠르스크 눈밭의 정경홍씨 명복을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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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국적에 가짜 이름으로 러·우戰 총알받이로 간 북한군

아들 잃은 北 엄마는 울지도 못해… 새해엔 죽음의 정쟁화가 없기를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은 참으로 신묘한 것이 필체만 봐도 글쓴이의 성품이 어림짐작된다. 정경홍씨가 유품으로 남긴 편지를 보고 나서 그가 어떤 사람이었을지 궁금해졌다. 정씨는 지난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격전지인 쿠르스크에서 죽은 북한 병사다.

“그리운 조선, 정다운 아버지 어머니의 품을 떠나 여기 로씨야(러시아) 땅에서 생일을 맞는 저의 가장 친근한 전투 동지인 송지명 동지가 건강하길 진정으로 바라며 생일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라고 그는 썼다. 유독 크게 기울여 쓴 그리운의 ‘ㄱ’과 남다른 필압으로 눌러쓴 생일의 ‘ㅅ’ 등에서 고향과 가족을 향한 절절한 그리움과 우정을 각별히 여기는 마음씨가 뚝뚝 묻어났다. 전쟁터 한복판에서도 친구의 생일이 기억났고, 그 마음을 모눈종이 격자 선에 새겨둔 청년. 위도(緯度)가 조금만 더 아래인 곳에서 태어났더라면 전기장판 켜놓고 손흥민의 축구 경기를 보거나 온라인 게임 삼매경에 빠져 있었을 텐데. 그나저나 송지명씨는 지금 살아있을까.

정씨처럼 많은 북한 청년이 이 겨울 쿠르스크 눈밭에서 위조 여권을 품고서 죽어가고 있다. 유엔군의 6·25전쟁 참전이나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처럼 여태껏 외국군이 파병된 사례는 많지만, 가짜 국적에 가짜 이름을 갖고서 참전한 일은 없었다. 북한군은 시베리아의 투바 자치공화국이나 부라티야 자치공화국에서 발급한 가짜 신분증에 엉터리 러시아식 이름을 배정받고서 푸틴이 만든 전쟁터로 내몰리고 있다. 최근 김 칸 솔라트 알베르토비치, 동크 잔 수로포비치, 벨리에크 아가나크 캅울로비치가 죽었는데 실은 리대혁, 조철호, 반국진씨가 죽은 것이다. 이들은 증명사진조차 누락된 러시아어 범벅의 가짜 여권 한 귀퉁이에 진짜 한글 이름을 암호처럼 적어뒀다. 태어나 처음 가보는 외국 땅이 죽으러 가는 땅이고, 그러려고 발급받은 생애 첫 여권은 위조로 얼룩져있는 인생. 본디 여권이란 자유롭게 해외를 오가려고 필요한 것이고, 북한 밖의 세상은 여권 하나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걸 이들이 죽기 전까지 알기나 했을는지.

러시아 서부 쿠르스크는 지난 8월 우크라이나군이 기습 점령하면서 러·우 전쟁의 최대 격전지로 떠올랐다. 사방이 탁 트인 개활지인 까닭에 80여 년 전 2차 세계대전 때도 만슈타인 장군이 이끄는 나치군과 주코프 장군이 지휘하는 소련군이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차전으로 맞붙었던 곳이다. 그런 눈 덮인 허허벌판을 북한 병사들은 호위해 주는 탱크 하나 없이 잰걸음으로 돌격하고, 칠면조 사냥을 당하듯 우크라이나군 드론에 픽픽 쓰러지고, 이내 들개의 먹잇감이 되고 있다. 그렇게 아들을 잃은 북한 엄마는 소리 내 울지도 못하고 당국에 불려가 발설 금지를 강요하는 서류에 지장을 찍고 온다. 사람을 생체 로봇으로 여기는 세상에서나 가능한 일들이다. 북한이 1만명 넘는 군인을 러시아로 보냈다는데, 미국 백악관에 따르면 지난 연말 일주일 사이에 1000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고 한다. 피 값으로 얻게 될 돈과 군사 기술에만 관심이 있는 김정은은 사상자가 늘어날수록 기쁠 것이다.

자녀를 앞세우는 고통을 상명(喪明)의 아픔이라고 표현한다. 이 세상에서 내 아이가 사라지는 일은 태양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아서 온 세상이 칠흑처럼 캄캄해진다는 뜻이다. 한반도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어서 그런지 올겨울 하늘이 유달리 어둡다. 모든 사별은 애달프고 비통하기 마련인데, 한국 사회는 어떤 죽음엔 핏대를 세우고 어떤 죽음엔 무관심한, 슬픔의 정쟁화에 익숙해지고 있다. 인권을 부르짖는 진보 진영 인사들이 북한군의 떼죽음에 대해선 별말이 없길래 대신하여 정경홍씨와 그 부대원들의 명복을 빌고자 한다. 새해에는 이 땅에 통곡과 눈물이 멎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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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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