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구속 등을 촉구하며 트랙터를 몰고 상경한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봉준투쟁단이 지난해 12월21일 경기 과천대로에서 남태령을 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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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4년(정조 8년) 9월4일 흰옷에 갓을 쓴 사내가 남산 꼭대기 근처에서 서성대다가 봉수군(봉화 올리는 군사)에게 잡혔다. 몸을 뒤지니 작은 종이쪽 10장, 짚단 2묶음, 유황 덩어리 5개가 나왔다. 사내의 이름은 공천(孔賤)이었다. 본래 함경도 사람으로 13살에 중이 되어 유랑하다가 지난해부터 동래군 국청사(國淸寺)에 머무르고 있다고 하였다. 서울에 온 것은 왕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였다. 그런데 떠돌이 중을 왕이 만나주겠는가? 유황과 짚단으로 불을 지르려고 한 것은 이목을 끌어 말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였다.
종이쪽에 그가 하고자 했던 말이 쓰여 있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환곡(관에서 빌려주는 곡식)이다. 나라에서 봄에 먹지도 못할 곡식을 환곡으로 빌려준다는 것이다. 가을에 깨끗한 새 곡식으로 이자까지 쳐서 받아가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어 젖먹이 어린아이를 군역(軍役, 군대에 가도록 등록하는 것)에 올리지 말 것, 부잣집에서 고리대금업으로 재산을 불리는 것을 금할 것을 요청했다. 말은 어수룩했지만, 그가 말한 11가지 조목은 당시 사회의 핵심적 문제였다. 하지만 떠돌이 중 따위가 하는 말에 누가 귀를 기울이겠는가? 공천은 호된 매를 맞고 귀양을 갔다.
7년 뒤인 1791년(정조 15년) 1월22일 형조(오늘날 법무부)는 백성 박필관(朴弼寬)이 격쟁(擊錚, 징이나 꽹과리를 쳐 왕에게 말하는 일)하여 요청한 사항을 정조에게 보고했다. 요청 사항은 다섯 가지인데, 그중 중요한 것은 다음 둘이다. 향촌의 세력가가 토지를 무한정 소유하는 폐단을 막기 위해 토지는 30결 이상, 노비는 30구 이상을 소유하지 말도록 법으로 정할 것, 군포를 20자 이상 거두지 말 것!
정조의 답은 이랬다. 토지와 노비 소유의 상한선을 법으로 정하자는 아이디어는 좋기는 하지만, 도리어 사회적 소요만 야기할 것이고, 군포 수취 문제는 아예 논의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머지 시시한 것들은 각 도에 공문을 보내 시행하게 하라고 지시했지만, 그 지시를 따를 지방관은 아무도 없었다.
박필관의 토지 소유 상한제는 이른바 한전론(限田論)이라 불리는 것이다. 박필관은 그 용어와 역사는 몰랐지만, 문제의 해결책을 스스로 깨치고 있었던 것이다. 해결책은 박필관 한 사람이 아니라, 당시의 민중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었을 터이다. 또 그것은 서울로 가서 왕과 지배계급에게 요구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떠돌이 중 공천이 머리를 기르고 서울로 가 남산에 불을 지르려 했던 것도, 박필관이 왕이 거둥(임금의 나들이)하는 길에서 꽹과리를 친 것도 말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왕과 지배계급은 그들의 입을 막고, 자신들의 귀를 막았다.
말할 기회조차 없는 상황에서 민중의 행로는 빤하다. 수탈에 시달리다가 토지를 빼앗기고 쫓겨나면 유랑 걸인이 되어 길바닥에서 죽기 마련이었다. 용력(뛰어난 힘)이 있는 자들은 쉽게 군도가 되었다. 규모가 작으면 행인의 물건을 털지만, 큰 경우 명화적(도적)이 되었다. 실제 ‘실록’과 ‘승정원일기’ 등 관찬 사료를 읽으면 명화적에 관한 기록이 쏟아진다. 공천과 박필관이 등장하기 전의 몇몇 사례를 보자.
(1)1727년, 김제 전주 등지에서는 명화적 100여명이 촌락 하나를 포위하고 의복과 기명(그릇)을 모두 약탈했다.
(2)1734년, 교하 파주 일대에서 활동한 명화적은 50~60명으로, 이들은 북과 꽹과리 소리에 나아가고 물러가는 군대와 같았다고 한다.
(3)1752년, 김포 노장면에 총을 쏘고 깃발을 들고 들이닥친 명화적은 수백명이었다.
(4)1765년, 정언 박필순(朴弼淳)은 금성(金城)의 명화적을 300명, 많게는 400명이라고 말했다.
모두 ‘승정원일기’와 ‘영조실록’에 실린 것이다. 이들이 연합에 연합을 거듭하면 결국 명조(명나라)를 무너뜨린 이자성이 될 것이었다. 조선에서도 그럴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1728년 변산반도의 군도는 소론의 과격한 정파인 준소(峻少)가 일으킨 이인좌의 난에 주력군으로 참여했다. 군도는 왜 참여했을까? 한양을 점령하여 난이 성공했다면 군도, 곧 농민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농민에게 유리한 개혁이 있었을 것이다. 박지원의 ‘허생전’에 등장하는 군도는 바로 이 변산반도의 군도다. 허생은 군도를 나가사키와 사문(沙門) 사이의 무인도에 데려가 국가권력이 없고 토지를 공유하는 사회를 만들었다. 토지의 공유가 변산반도 군도의 염원이었고, 농민의 염원이었던 것을 박지원은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인좌의 난에 참여한 군도는 끝내 서울로 들어가지 못했다. 난이 평정된 뒤 군도들은 지리산으로 스며들었다. 한동안 지리산과 이웃 덕유산 골짜기 사이에 군도가 가득했다고 한다(‘승정원일기’ 영조 5년(1729) 윤7월16일). 민중의 저항적 에너지가 다시 모이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홍경래의 난(1811), 진주민란(1862)으로 모였다가 흩어졌다. 하지만 어떤 경우도 지역을 벗어나 지배권력의 핵심이 있는 서울로 진입하지 못했다. 에너지는 최후로 동학으로 집결되었지만, 이 역시 충청도 공주 우금치에서 외세를 끌어들인 지배계급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나는 이것이 한국사 최대의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지난해 12월21일 전국농민회총연맹과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이 조직한 전봉준투쟁단의 트랙터가 시민들과 연대하여 남태령을 넘어 서울로 진입했다. 남태령 너머의 세상은 어떤 세상이어야 하는가.
강명관 인문학 연구자
강명관 인문학 연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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