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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8 (수)

교수·언론·정치 거쳐도… 사진가의 삶 가장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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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영 前 문화공보부 장관 별세

조선일보

6일 별세한 고(故) 윤주영 전(前) 문화공보부 장관이 지난 2011년 강원도 영월 동강사진박물관에서 열린 자신의 사진전을 앞두고 카메라를 손에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대학교수와 조선일보 편집국장, 칠레 대사, 문화공보부 장관, 국회의원을 지내고, 이후 30여 년을 사진작가로 살았던 그는 평소 “거짓이 없고 기록으로서도 생명력 있는 사진작가의 삶이 제일 재밌다”고 말하곤 했다. /이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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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원로 언론인이자 정치인, 사진가로 활동했던 윤주영(97) 전 문화공보부 장관이 6일 별세했다. 대학교수와 언론인, 외교관, 장관, 국회의원을 거쳐 인생 후반기로 접어드는 51세에 카메라를 잡고 사진작가로 데뷔한 고인의 사진 작품들은 ‘시대정신을 반영한 정공법’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정직하고 왜곡되지 않은 시각으로 피사체를 잡아낸 그의 작품들은 평생 시대를 직시해 온 전문가로서의 시각이 반영된 결과였다.

1928년 경기도 장단군(현 개성시 장풍군)에서 태어난 고인은 고려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1955년 27세에 중앙대 정치학과 교수로 임명돼 후학을 양성했다. 1957년부터 1961년까지 조선일보 논설위원 및 편집국장을 지내면서 언론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민주공화당 대변인, 칠레 대사, 청와대 대변인을 거쳐 문화공보부 장관(1971~1974), 국회의원(1976~1979) 등을 지냈다. 문공부 장관 시절 투철한 실행력으로 국내 문화 행사부터 해외 홍보까지 진두지휘하는 ‘뚝심있는 장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주요 요직을 거쳤던 그가 취미 삼아 들었던 카메라로 ‘제2의 인생’에 도전한 게 1979년이다. 50이 넘은 때였다. 당시 영국에 잠시 체류하던 시절에 찍은 사진들을 보고 중진 작가들이 격려해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렇지만 이후 수십 년 사진에 몰두하게 될 줄은 몰랐다. 1979년 이후 사할린 동포, 베트남에 남겨진 한국인의 아내와 자식들, 미혼모 등 사회성 강한 작품들을 찍었다. 특히 삶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는 탄광촌, 어촌, 시장을 다니며 다양한 사람을 통해 시대상을 포착해 냈다. 60세에 처음 펴낸 사진집 ‘내가 만난 사람들’을 비롯해 ‘탄광촌 사람들’ ‘일하는 부부들’ ‘어머니’ 등을 통해 한국을 대표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이름을 날렸다.

언론인으로 다져온 예리한 감각은 고인의 앵글을 통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그에게 사진은 기록이자 메시지였다. 한국을 일으킨 산업 역군들의 깊이 파인 주름과, 굽은 어깨, 거친 손으로 세상을 품어준 어머니들의 모습 등 그가 카메라로 잡아낸 모습은 보는 이들을 절로 고개 숙이게 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세상을 고발하면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았다. 장애 아동에서 입양아 문제까지 사회의 어두운 면을 밝히는 플래시 역할을 하면서도 날 선 고발의 성격보다 세상을 감싸안는 따스함을 부각 시켰다.

우직한 사진 한 장이 백 마디 말을 대신하기도 했다. 남미 오지, 인도, 네팔, 베트남, 캄보디아, 사할린 등지 등 지구촌 곳곳을 찾아 삶과 죽음의 경계, 전쟁으로 폐허가 된 모습 등을 직설적으로 잡아내면서도 그들이 꿈꾸는 소박한 희망도 놓지 않았다. 고인은 과거 조선일보와 한 인터뷰에서 “그들의 인생을 통해 우리들이 겪은 역사와 우리가 미처 몰랐던 역사의 진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이상 다행인 일은 없겠다”고 밝힌 바 있다. 사진에 대해 “거짓 없고 기록으로서도 생명력이 살아 있다”고 평했던 그는 스스로 “사진작가의 삶이 제일 재밌다”고도 했다.

전문가들은 수십 차례의 개인전과 사진집을 선보인 그의 사진 근간에는 ‘휴머니즘’이 살아있었다고 평가한다. 1990년 네팔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을 찍은 ‘내세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사진상 ‘이나노부오상’을 받기도 했다. 냉혹한 시절을 살아내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은 그가 마지막까지 카메라를 놓지 못하게 한 힘이 되어주었다. 제16회 한국현대사진문화상(1993), 제3회 백오사진문화상을 받았다. 1991년부터 고인을 사진가로 만났다는 연극인 박정자는 “선생님은 큰 목소리 내지 않고 늘 주변을 살피는 분”이었다면서 “연극도 꾸준히 관람하시며 나에게서 ‘어머니상(象)을 찾았다는 말씀에 부족하고 부끄럽기만 했는데, 떠나셔서 아쉽다”고 밝혔다.

유족으로는 아들 원섭·기섭, 딸 미혜, 며느리 김기령, 박신영, 사위 지범하씨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 여의도성모장례식장 7호실, 발인은 10일 6시 30분. (02)3779-2190

[최보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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