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오후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 인근에서 윤석열 탄핵 반대 집회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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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재 | 논설위원
“비상한 경우에는 비상한 조치를 필요로 한다. 어제 17일 19시를 기하여 이 나라는 비상조치를 선포하였다. (…) 우리는 이 사태에 직면하여 오늘 우리에게 부닥친 안팎의 모든 정세를 살펴보며 조국의 앞날의 걸어가는 길을 내다볼 때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알맞은 조치로서 이를 환영하지 않을 수 없다. (…) 헌법기능의 일부 정지와 이에 따르는 몇 가지 조치가 선포된 것은 새로운 헌정질서의 정립을 위하여 만부득이한 조치였음은 말할 것도 없고 (…) 이번 비상조치에 의하여 많은 국민들은 충격도 없지 않았을 것이지만 (…) 각자의 직책에 더욱 충실하며 민족적 대의에 기여하기를 권고해 마지않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 체제를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 다음 날인 1972년 10월18일치 조선일보 사설이다. 아무리 민주주의가 실종된 야만의 시대였다지만, 지금 이 신문 기자들이 봐도 낯뜨거울 것이다.
조선일보는 7년여 뒤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잔혹하게 진압한 직후 이런 사설도 썼다. “광주사태를 진정시킨 군의 어려웠던 사정을 우리는 알고 있다. (…) 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 계엄군은 일반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극소화한 희생만으로 사태를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다.”(1980년 5월28일)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한 전두환에 대해선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천성적인 결단은 그를 군의 지도자가 아니라, 온 국민의 지도자상으로 클로즈업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1980년 8월23일)라고 했다.
조선일보는 전두환에게 잘 보인 덕분인지 5공화국 내내 잘나갔다. 신군부의 언론통폐합으로 당시 부동의 1위였던 동아일보가 동아방송을 잃는 등 경쟁지들이 고전을 면치 못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이 신문이 최근 12·3 내란사태를 보도하는 태도는 40여년 전의 흑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기계적 중립을 가장한 ‘물타기’로 윤석열과 내란 비호 세력을 돕는다. 박정희·전두환 정권 때처럼 차마 편들지는 못하겠는지, 내란 세력을 단죄하려는 수사에 딴지를 건다.
이 신문은 지난 6일치 ‘법이 무너졌다’는 제목의 1면 기사에서 ‘내란죄 수사권 없는 공수처 수사’, ‘판사의 입법권 침해 영장 발부’ 등이 윤 대통령의 체포영장 집행 거부에 빌미를 줬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빌미’를 제공한 건 바로 조선일보다. 체포영장 집행 전날인 2일 ‘법 위에 선 판사’라는 기사에서 체포영장을 발부한 판사를 얼굴 사진까지 실어 공격했다. 체포를 위한 수색영장에 ‘(군사상 비밀에 관한 곳은 책임자가 허락해야 압수수색이 가능하다고 규정한) 형사소송법 110·111조 적용 예외’라고 기재한 것을 두고, “삼권분립 원칙과 법률을 어긴 것”이라는 익명의 전문가 멘트를 받아 마치 위법한 영장인 것처럼 보도했다.
그러나 법원은 5일 윤 대통령의 ‘체포영장 집행 이의신청’을 기각하면서 이런 주장을 일축했다. “피고인 발견을 목적으로 하는 수색의 경우에는 형사소송법 137조가 적용되며, 그 경우 형사소송법 110조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했다. 영장에 이 내용을 기재한 것은 “법령 해석이라는 사법권 범위 내에서 법관이 할 수 있는 행위”라고 판단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내란죄 수사권에 대해서도 “이 체포영장 및 수색영장의 혐의사실에는 내란죄뿐만 아니라 직권남용죄의 혐의사실이 포함돼 있어 공수처법에 포함된 범죄”라며 “이와 관련 있는 내란죄를 혐의에 포함했다고 해서 위법이라고 할 수 없다”고 봤다. 법 해석 권한이 있는 사법부의 판단에도 불구하고 조선일보는 7일치 사설에서 “계엄과 같은 초법적 발상”이라고 재차 주장했다.
이 신문의 한 편집국 간부가 쓴 칼럼은 할 말을 잊게 한다. 12월3일 밤 육군 특수전사령부 707 부대가 국회로 출동하기 직전 야당 의원에게 관련 정보가 새어 나간 것이 “몰래 정치적으로 줄을 댄 군인” 탓이란다. 쿠데타를 막기 위해 ‘제복 입은 시민’으로서 할 일을 한 것을 “정치질”이라고 비난할 일인가.
이정환 슬로우뉴스 대표는 최근 국회 토론회에서 이 신문의 ‘윤석열 편지가 불러 모은 분열의 깃발’ 기사(3일치 1면)에 대해 “혼란과 대립을 강조하면서 내란 범죄와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전선을, 보수와 진보의 대립인 것처럼 프레임을 뒤섞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런 ‘물타기’가 극우 세력의 준동을 부추긴다는 사실을 조선일보는 모르는가.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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