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철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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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내게는 소설에 나오는 그럴듯한 말을 따라 하는 버릇이 있었다. 소설 속 등장인물이 되기라도 한 듯 등장인물이 하는 말을 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으로부터 잘 지내느냐고 묻기도 어려운 시절이라는 말을 듣고 하마터면 열 살 때 버릇이 나올 뻔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열 살이 아니고, 부끄러울 짓은 하지 않는다. 내가 따라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었다. “어떻게 좋을 수가 있겠어요? 이렇게 정신적으로 괴로운 때에…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지금 같은 세상에 평온할 수 있을까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시작되자마자 나오는 말이다.
나는 괴로울 때마다 이 책을 편다. 나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이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로부터 참을 수 없는 슬픔을 느낄 때. 그 일들이 너무도 크고 복잡하고 어지러워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참혹한 기분이 사라지지 않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란 존재의 미미함과 무능함에 내가 먼지처럼 느껴질 때. 산다는 건 뭔지 인간이라는 건 뭔지 회의감이 들 때. ‘전쟁과 평화’를 펴서 아무 데나 읽는다. 첫 페이지부터 읽기도 하고 4권의 마지막 장부터 읽기도 한다. 나는 이 책을 일종의 성경으로 여긴다.
최근에 세상에 대한 우울감이 커져 다시 나의 성경을 폈다. 책을 보다가 내가 느끼고 있는 고통을 지칭하는 단어가 있다는 게 떠올랐다. 벨트슈메르츠Weltschmerz. ‘세계’라는 뜻의 벨트(welt)와 ‘고통’이라는 뜻의 슈메르츠(schmerz)의 합성어인 독일어. 그러니까 ‘세계의 고통’이라는 뜻이다. 벨트슈메르츠는 이런 것이라고 한다. “잔인하고 무자비한, 차갑기 그지없는 거대한 세상 속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느낄 때 밀려드는 고통과 슬픔. 다시 말해서 나의 주체성과 자유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현실이 있고, 그런 현실의 파도에 제대로 맞서지 못하고 속절없이 휩쓸리는 모래알 같은 내 모습에서 오는 통증을 말한다.”(이진민, ‘모든 단어에는 이야기가 있다’)
‘전쟁과 평화’에는 세계의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잔뜩 나온다. 그들의 고통이 너무 커서 나 정도의 고통은 모래알처럼 하찮게 느껴진다. 그들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원인, 그러니까 “이렇게 정신적으로 괴로운 때”로 몰아넣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은 나폴레옹이다. 나폴레옹이라는 침략자가 세계를 뒤흔들고 있어서 불안이 고조되는 러시아가 배경이다. 나폴레옹을 규탄하는 게 소설의 첫 문장일 정도. 소설은 혼돈의 시대를 살고 있는 러시아 귀족들이 살롱에 모여 사교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나폴레옹을 추앙하는 사람도 있어서 신경전이 벌어지는데, 나폴레옹을 지지하는 이유는 그가 자신이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삶의 가능성을 대리 충족하는 메타포라서다. 일개 중위에서 황제가 된 세계적 신분 상승의 아이콘 아닌가.
소설의 시간은 1805년과 1812년, 그리고 1820년을 다룬다. 1805년은 유럽을 침략해 프랑스의 영토로 만든 나폴레옹이 러시아에 외교적 관계를 제안하고, 러시아는 거부하는 상황이다. 1812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사상자가 많았던 전쟁 중 하나로도 말해지는 1812년 전쟁을 다룬다. 누군가는 ‘러시아 원정’이라고 하고 러시아에서는 ‘대나폴레옹 조국 전쟁’이라고 하는 그 전쟁을. 1820년의 시점은 참혹한 전쟁이 끝난 후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전쟁과 평화’를 처음부터 읽는다는 것은 1805년의 관점에서 시작하는 것이고, 4권의 마지막 장부터 본다는 것은 1820년의 시점을 읽는다는 말이다.
오늘의 나는 4권 마지막에서 시작했다. 전쟁이 끝나고 많은 사람이 죽고 나서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가까운 사람이 죽고 난 후의 사람들은 죽음에 위축되어 삶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미래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은 고인을 욕되게 하는 일로 느낀다. 결국 그들을 살게 하는 것은 죽은 자들이 가버린 세계가 아닌 이 세계가 자신들이 살아야 하는 세계라는 현실 인식이다.
“수백만의 사람이 서로를 죽이고 100만의 절반이 죽은 사건”을 다루는 이 소설에는 역자인 박형규 선생의 말처럼 전쟁과 죽고 죽이는 슬픔과 고통의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질투하고, 진리와 미덕을 추구하는 이야기와 열정과 따스함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이야기를 다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톨스토이의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말한다. 오늘 나의 성경에서 발견한 문장은 이것이다. “삶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으므로 살아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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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형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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