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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무대 위에 섰다. 시그니처와 같은 검은색 가죽 재킷을 입고 있었고, 엔비디아의 거대한 그린 로고가 그 뒤에서 빛났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 컴퓨터 칩으로 세상을 정복한 남자.
"이것은 최고경영자(CEO)가 자신이 틀렸다고 설명하기 위해 업계 모든 전문가를 초대한 사상 최초의 행사입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있었지만, 그 밑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3월 20일,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의 대형 공연장. 엔비디아 연례 개발자 회의 GPU Technology Conference(GTC) 4일 차에 열린 '퀀텀데이'라는 행사였다. 양자컴퓨터. 양자역학의 원리를 이용해 연산 속도를 획기적으로 끌어올린 새로운 개념의 컴퓨터로, 인류 난제를 풀어줄 미래의 주인공으로 여겨지는 기술이다.
사건의 발단은 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황 CEO가 "매우 유용한 양자 컴퓨터가 상용화에는 20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고, 그 말이 퍼져나가자 아이온큐, 리게티, 디웨이브 같은 양자컴퓨터 회사들의 주가가 하루 만에 60%나 폭락했다. 한 사람의 말 한마디가 이토록 강력한 파장을 일으켰다.
그의 말에서는 진정한 놀라움이 느껴졌다. 상장된 회사라는 것은 증권거래소에 등록되어 일반 투자자들도 주식을 살 수 있는 회사를 의미한다. 아직 상용화하지 않은 기술을 다루는 회사들이 이렇게나 많이 시장에 공개돼 있다는 것을 몰랐고, 이 때문에 자신의 발언이 가져올 파급력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약 2시간 동안 이어진 대담에서 황 CEO는 양자컴의 가능성을 열심히 띄웠다. 그는 "양자컴퓨팅은 잠재력이 매우 큰 기술"이라며 특히 "생물학, 화학, 물리학 같은 분야에서 명확한 답을 주고, 신약 개발이나 신소재 연구에 돌파구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양자컴 개발을 가속화하는 것을 목표로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 가속 컴퓨팅 등을 연구하는 '엔비디아 가속 양자 연구센터'를 설립하겠다고도 밝혔다.
그렇게 황은 이날 행사를 통해 사과의 제스처를 취했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사과는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전망이 틀리지 않았다는 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이 기술은 엄청나게 복잡해 (양자컴 개발이라는) 성과를 이루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엔비디아도 지금의 회사로 발전하기까지 거의 20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므로 15년, 20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은 내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번 행사를 "사과 아닌 사과에 그쳤다"고 평가했다. 그것은 정확한 표현이었다. 그는 사과하는 척하면서, 여전히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황 CEO는 이날 양자컴퓨터를 '컴퓨터'라고 부르는 것 자체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양자컴퓨터를 '컴퓨터'라고 소개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방향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컴퓨터라고 하면 메모리, 네트워크, 저장 장치가 있고, 읽고 쓸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대신 '컴퓨터를 더 좋게 만들어줄 양자 프로세서' 혹은 '과학 장비'로 소개하는 게 업계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행사를 마친 후, 황 CEO는 GTC 행사장에 마련된 삼성전자 부스를 찾아 그래픽 메모리 'GDDR7' 위에 서명하고 '삼성 GDDR7 최고'라고 남겼다. 이는 지난 1월 CES 2025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그래픽 메모리를 안 하는 걸로 안다"고 잘못 말했던 것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사과였을지도 모른다.
GDDR7은 엔비디아의 최신 게임용 그래픽카드인 '지포스 RTX 5090'에 탑재된 메모리다. 황 CEO는 '삼성(SAMSUNG)'이라는 단어와 함께 'GDDR7 최고!(GDDR7 Rocks!)' 'RTX는 계속된다(RTX ON!)'고 적었다.
황 CEO는 지난 1월 정보기술(IT)·가전 전시회 CES 2025에서 "RTX 5090에 마이크론 메모리를 탑재한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는 질문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그래픽 메모리를 안 하는 걸로 안다"고 답해 논란이 됐다. 다음날 성명을 내고 "지포스 RTX 50시리즈에는 삼성 등 다양한 파트너사의 GDDR7 제품이 들어간다"고 정정했다.
그리고 이날 젠슨 황이 무대 위에서 보여준 것은, 기술의 미래가 단순한 기술적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그것을 어떻게 이야기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현실이었다. 이날 행사는 새로운 기술이 시장에 어떻게 인식되고, 평가되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였다.
글 : 손요한(russia@platu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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