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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40초간 트럼프와 16번 눈맞춤…31조 보따리 푼 정의선 베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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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지난 24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210억 달러 규모 대미 투자 방안을 밝히고 있다. 옆은 이를 지켜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제프 랜드리 루이지애나 주지사.(왼쪽부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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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현지시간) 오후 2시30분 미국 워싱턴DC 소재 백악관 루즈벨트룸. 검은 양복에 짙은 하늘색 넥타이 차림을 한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상기된 표정으로 연단에 섰다. 불과 3주 전 웨이저자 TSMC 회장이 1000억 달러(147조원) 규모 대미투자를 발표했던 바로 그 자리였다.

정 회장의 시선은 그의 왼쪽 뒤편에 비켜서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로 먼저 향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연설할 기회를 주셔서 대통령께 감사드리며 새 임기의 놀라운(remarkable) 시작을 축하드린다.” 이렇게 발표를 시작한 정 회장은 3분 40초간 트럼프 대통령과 16차례 눈을 맞추며 그를 추켜세웠다. 오는 26일(현지시간) 준공될 조지아주 신공장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를 소개하며 “이 결정은 (트럼프 1기 시절인) 2019년 서울에서 열린 트럼프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시작됐고, 2020년 다보스에서도 신공장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고 설명했다.

현대차그룹이 80억 달러(약 11조8000억원)를 투자해 만든 HMGMA는 바이든 행정부 시절인 2022년 10월 착공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첫 임기 때 끌어낸 성과라는 점을 정 회장이 강조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이곤 “맞다”(it’s right)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현대차그룹이 210억 달러(약 31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 계획을 발표한 백악관 현장에선 정 회장의 이같은 전략적인 제스쳐가 여러 차례 포착됐다.

이날 발표는 다음 달 2일로 예정된 자동차 관세 25% 부과를 9일 앞두고 나왔다. 세부적으로는 ▶메타플랜트 증산(30만→50만대) 및 조지아·앨라배마주 기존 공장 현대화(86억 달러) ▶루이지애나주 270만톤(t) 생산 규모 전기로 제철소 건설(61억 달러) ▶미국 자율주행·AI기업 투자 및 미시간주 소형모듈원전(SMR), 텍사스주 태양광 발전소 건설(63억 달러) 등에 투자된다. 210억 달러와는 별개로 현대차그룹은 30억 달러 규모의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를 구매해 국내외 완성차·철강 공장 및 자동차운송선 연료로 쓸 예정이다.

중앙일보

신재민 기자


정 회장은 이 자리에서 “현대차그룹은 1986년 미국에 진출해 200억 달러 이상을 투자해왔고, 50개 주 전역에서 57만개 이상의 미국 내 일자리를 창출했다”며 “앞으로 4년간 미국 내 210억 달러 규모의 신규 투자를 발표하게 돼 기쁘다. 이는 우리가 미국에 진출한 이래 최대 규모 투자”라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현대차는 훌륭한 기업”이라며 “현대차는 미국에서 철강·자동차를 생산해 (미국 생산분에 대해선) 어떤 관세도 안 내도 된다”고 답했다.



현대차그룹 미국 판매량 지난해 170만대…“놓칠 수 없는 시장”



이런 모습에 국내에선 “현대차그룹으로선 어떤 평가를 감수하고서라도 해야만 했던 일”(권용주 국민대 교수)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정 회장이 작정한 듯 역대 최대 규모의 대미투자 선물 보따리를 트럼프 대통령 앞에서 풀어놓은 것은 미국이 현대차그룹의 최대 수출 시장이란 점과 관련이 깊어서다. 지난해 현대차·기아는 미국에서 170만8293대를 판매했다. 지난해 국내외 판매량 723만1248대의 23.6%에 달해 단일국가 중 최대 시장이다. 지난해 내수 판매량이 124만5020대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현대차그룹에 미국은 이미 한국보다 더 큰 시장이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지난 24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210억 달러 규모 대미 투자 방안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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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4월 2일 미국의 수입산 자동차 관세 25%가 부과되면 현대차그룹으로선 피해가 적잖다. 지난해 미국 판매량 중 한국산이 99만5477대(비중 58.3%), 멕시코산이 14만1695대(8.3%)였다. 미국 현지에서 생산·판매된 차량은 57만1121대(33.4%)로 상대적으로 적었다. 신용평가사 S&P는 지난해 관세 20% 부과 시 영업이익이 최대 19% 줄어들 수 있다고 분석했는데 25%가 부과되면 이보다 손실이 더 크다.

이에 현재 연산 30만대 수준인 HMGMA의 생산 능력을 수년내 50만대까지 확장하고 기존 조지아공장(34만대), 앨라배마공장(36만대)까지 합쳐 연산 120만대 생산체제를 구축하겠다는 게 현대차그룹의 계획이다. 조철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정 회장이 직접 대미투자를 밝힌 건 장기적인 현지 생산 기조를 강조해 당장 다가올 관세에 부분적인 예외를 노리려는 것”이라며 “만약 관세를 피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생산·판매에 대해 트럼프 행정부의 배려를 받기 위해 적극적인 구애를 편 것 아니겠냐”고 관측했다.



현지 공급망 재편…“美 제조기업이라는 신호”



루이지애나주에 건설되는 현대제철의 전기로 제철소에도 관심이 집중된다. 생산능력 연간 270만t으로 자동차 강판 특화 제철소를 설립한다. 2029년 가동 목표로, 1400개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현대차그룹은 설명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지난 12일부터 부과하는 수입산 철강 관세(25%)에 대한 장기적 대비책 성격이 강하다.

특히 루이지애나주는 동쪽으로 앨라배마주~조지아주로 이어져 있는데 그 거리는 약 1000㎞여서 철로로 철강을 자동차 생산공장으로 바로 운송할 수 있다. 현대제철 측은 “물류비 절감과 안정적인 공급체계 구축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이번 투자안에는 현대건설의 미시간주 소형모듈원전(SMR), 현대엔지니어링의 텍사스주 태양광발전소도 포함됐다.

중앙일보

김영옥 기자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현대차그룹은 이제 한국에서 물건을 가져와 파는 회사가 아니라, 소재부터 중간원료, 완성차제조까지 총체적 공급망을 구축한 미국 제조기업이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라며 “특히 미시간주를 제외한 나머지 4개 주는 공화당 우세 지역이어서 현대차그룹이 정치적 사안까지 고려했다고 볼 수 있다”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현대차그룹의 미국 생산 확대는 국내 생산 감소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이항구 한국자동차연구원 자문위원은 “수년 내 10만~30만대의 국내생산량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며 “약 5000명이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는데, 현대차는 매년 약 2000명 가량의 정년퇴직과 신규채용 최소화로 충격을 완화하려고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효성·오삼권 기자 kim.hyos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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