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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시간> 비극은 이미 진행되는 중이다, 당신 아들의 방과 스마트폰 속에서[위근우의 리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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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반 친구의 살해 용의자가 된 13세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 시리즈 <소년의 시간> 중 한 장면.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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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무 것도 안 한 것 믿어?” “당연히 믿지. 넌 내 아들이잖아.” 지난 3월 13일에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소년의 시간> 1화에서 이른 아침부터 경찰들에게 살인 혐의로 잡혀간 13살 소년 제이미의 질문에, 영문도 모르고 쫓아와 동석 보호자가 된 아버지 에디는 답한다. 경찰의 사무적이지만 꽤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국선 변호사를 선임하고 취조에 동행하는 과정 동안 에디는 계속해서 오늘 아침부터 자신과 가족의 평온한 일상을 날벼락처럼 덮친 일들을 이해하기 위해 애쓴다. 그러다 첫 화 말미, 경찰은 제이미가 전날 저녁 같은 학교 여학생인 케이티를 흉기로 찌르는 CCTV 증거 영상을 보여준다. 그날 아침 갑자기 들이닥쳤다고 생각했던 파도는 실은 이미 그 전에 밀려왔던 것이다. 그저 그 사실을 몰랐을 뿐. 그렇다면 이 파도는 살인이 벌어진 어젯밤에 시작된 걸까. 살인의 동기는 언제부터 형성된 걸까. 언제 어떤 시간을 거쳐 제이미는 살인자가 되었을까. <소년의 시간>의 이야기를 범박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파고의 진원은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이 질문 앞에서, 서두에 인용한 에디의 대답은 무력하게 해체된다. 그는 제이미가 자신의 아들이기에 믿는다고 말했다. 자신의 아들이기에 잘 안다는 믿음, 자신이 괜찮은 인간으로 키웠다는 믿음, 부모로서 믿어주는 것이 인륜이라는 믿음의 확실성은 함께한 시간 동안 공통의 경험과 이해를 만들어왔다는 믿음 위에 서 있다. 하지만 부모도 미처 알지 못하는 불가해한 어떤 공백의 시간이 심연의 아가리를 벌릴 때 이 모든 믿음은 집어삼켜진다.


같은 반 친구의 살해 용의자가 된 13세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 시리즈 <소년의 시간> 중 한 장면.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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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 이후 작품이 제작된 영국을 비롯해 전 세계적인 반응을 끌어낸 것에서 볼 수 있듯, <소년의 시간>이 묘사하는 상황은 국가를 가리지 않고 동시대적인 보편적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내가 안다고 믿었단 아이가 실은 내가 알던 그가 아니라면? 물론 부모 자식 세대는 언제나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운 타자로 경험해왔지만, <소년의 시간>은 온라인 성범죄, 따돌림, 인셀(비자발적 독신주의자 Involuntary Celibate의 줄임말) 커뮤니티 문화 등 현재 아이의 스마트폰과 SNS에서 벌어지는 일과 해악에 대해 부모가 얼마나 무지하고 무관심한지, 섬뜩하게 경고한다. 살인 혐의로 제이미를 취조하던 경찰들은 그가 리포스트한 야한 여성 모델 사진들과 부적절한 댓글들을 보여주며 그의 비뚤어진 여성관에 대해 우회적으로 묻는다. 에디로선 처음 보고 듣는 이야기다. 하지만 또한 살인 동기를 파악하기 위해 학교에서 탐문 수사를 벌이는 배스컴 경위 역시 무지한 건 마찬가지다. 당장 본인 아들 애덤이 학교에서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모르지만, 그런 애덤이 헛다리 짚는 중인 아버지를 보다 못해 다양한 SNS 은어를 알려준 뒤에야 제이미의 인스타그램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다. 아이들의 삶과 정신에 비가역적인 변화가 벌어지고 있지만 부모와 선생은 통제는커녕 무엇이 벌어지는지조차 모르는 이 상황이 어떻게 공포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에디도, 배스컴 경위도, 사건 7개월 뒤 제이미의 상담을 맡은 심리학자 애리스턴도 불가해 보이는 심연을 이해하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것만이 이 숨 막히는 미지의 공포로부터 우리를 꺼내줄 것이기에.


하지만 제이미는 추리소설 <Y의 비극>의 재키 해터 같은 사이코패스 꼬마 살인마가 아니며, 악마는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다. 만약 <소년의 시간>이 좀 더 비겁한 작품이었다면 수사물의 형식 안에서 쉽고 깔끔한 방식으로 이 찜찜한 공포를 해소했을 것이다. 디지털 포렌식을 통해서든 심문을 통해서든, 제이미의 범죄 동기를 증명할 증거품이나 증언을 찾아내 범죄가 발생한 경위를 그 하나의 원인으로 환원한다면, 사건은 원인과 결과가 단순하고 선명한 서사가 되어 쉽게 이해가능한 것이 된다. 어떤 끔찍한 결과라도 인과관계만 명확하면 미지의 두려움은 해소된다. <소년의 시간>은 쉬운 길 대신 용감한 길을 택한다. 공포를 대면하는 것. 안다는 믿음이 무너졌을 때, 우리가 발을 디딜 출발점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인정이다. 제이미의 범죄가 밝혀진 1화 이후 각 에피소드마다 배스컴, 애리스턴, 에디는 시청자와 동일한 수준의 무지 위에서 역시 동일한 수준의 막막함을 경험한다. 배스컴에게 학교는 교육이 불가능한 동물 우리처럼 느껴지며, 애리스턴은 여성 상담사를 겁박하고 조롱하는 제이미의 폭력성에 부딪히고, 에디는 그동안 새벽 1시가 되어서야 불이 꺼지던 제이미의 방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조금도 가늠하지 못한다. 이들은 그 막막함을 헤치며 진실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다. 막막함 자체가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진실이라는 것이 <소년의 시간>이 말하는 바다. 수없이 회자되는 매 에피소드마다의 원테이크 촬영은 입이 벌어질 만큼 기술적으로도 대단하지만, 실시간으로 흘러가는 원테이크 안에서 주요 인물들은 지금 이곳의 한정된 공간과 시간 안에서 씨름할 수밖에 없다. 과거의 특정한 장면이나 행동에 인과의 연결고리가 있을 것처럼 제시하는 플래시백 같은 연출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애리스턴과의 상담 에피소드에서 맨박스에 갇힌 제이미가 자기혐오를 인셀 커뮤니티의 논리에 기대 여성혐오로 발산하는 과정은 동시대 온라인 기반 인셀 범죄에 대한 많은 힌트를 주지만, 그 모든 것은 편집에 의한 인과적 재구성이 아닌, 허세와 거짓말이 섞인 혼란스러운 진술의 행간에서 애리스턴의 말대로 제이미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통해 파편적으로 수집된다. 여전히 모르는 것 투성이며, 어쩌면 앞으로도 어떤 영역은 미스터리로 남을지 모른다. 단지 포기할 수 없을 뿐이다.


같은 반 친구의 살해 용의자가 된 13세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 시리즈 <소년의 시간> 중 한 장면.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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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마지막이, 제이미의 빈방을 비추는 것은 그래서 당연한 귀결처럼 보인다. 1화 초반, 에디 가족에게 경찰 침입은 평화롭던 일상을 하루아침에 비극으로 만든 사건이었다. 하지만 실은 비극은 이미 그 전부터 제이미의 방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너무나 조용히. 이 미지의 공간을 비추는 마지막 장면은 마치 제이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려는 시도처럼 느껴진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이 공간은 어떤 생각들로 채워졌을까. 아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부족함 없이 채워주려 한 그 공간에서 정작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에디도 시청자도 알 수 없다. 단지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만이 확실할 뿐이다. 이것이 에디의 집에서, 그리고 그들의 사연에 공감하거나 위기감을 느끼는 전 세계 수많은 가정이 맞닥뜨린 진실이다. 아내 맨다의 의구심처럼 에디의 가끔 발끈하는 마초적 성격이 제이미에게 잘못된 남성성 관념을 심어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한 에디는 자기 아버지에게 맞고 자란 과거를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 아버지이기도 하며, 폭력으로 통제하지 않은 아들과의 시간이 이토록 엇나간 것에 대해 당혹감을 느낀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의 원인만 제거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깔끔한 인과란 존재하지 않는다. 통제되지 않는 학교가 동물 우리 같다고 해서 에디가 매 맞던 시절의 야만적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없으며, 자신들이 사회적 약자라 믿는 인셀들의 피해망상을 수 천 수 만의 상담사가 상냥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줄 수도 없는 일이다. <소년의 시간>은 답이 없어 보이는 상황을 가차 없이 우리에게 대면시키는 동시에 그것을 고통스럽게 직시하는 것이 책무임을 일깨운다.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애쓰는 에디 가족을 담은 마지막 에피소드는 가해자 가족에 대한 연민 같은 것이 아니다. 대체 무엇을 했어야 아이가 엇나가지 않을 수 있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맨다의 말처럼 “우리가 뭔가를 했어야 했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 누구도 세상을 이렇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됐다. 우선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중인지 이해하는 게 먼저다. 이해하기 쉽게 오리고 이어 붙일 수 없는 길고 지루한 원테이크의 현실 속에서.


<위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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