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중국을 방문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함께 다롄 해변을 산책하고 있다. 다롄/신화통신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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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정상회담이 끝나자마자, 국제질서를 뒤흔드는 초대형 외교 이벤트가 막을 올렸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다음달 3일 중국의 ‘항일전쟁 승전 80주년 기념 열병식’에 참석한다고 북한과 중국이 나란히 발표했다. 베이징 톈안먼(천안문) 망루에 김정은 위원장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나란히 서서 미국 중심의 기존 국제 질서에 도전하는 ‘북-중-러’ 3각 연대를 과시하는 순간을 곧 보게 되는 것이다. 한국 외교에 무거운 과제가 던져졌다.
김 위원장은 이를 통해 자신의 높아진 국제적 위상을 세계에 과시하면서 ‘두가지 길’을 예고한다. 하나는 한국 정부가 공을 들인 한·미·일 협력에 맞서는 북·중·러 대립 구도의 축이 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미 확보한 러시아와의 긴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중국과 우호관계를 복원하고, 이를 바탕으로 가능하다면 가장 유리한 조건에서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협상을 하겠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두가지 카드를 모두 손에 쥐고 활용하면서,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겠다는 계획인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한국과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한국 패싱 의도가 명확하다는 점이 한국 정부가 마주한 딜레마다.
중국은 이번 ‘항일전쟁 승전 80주년 기념 열병식’을 미국 중심의 기존 국제질서의 쇠퇴와 중국-러시아 주도의 새로운 다자주의 국제질서를 보여주는 무대로 준비해 왔다. 여기에 김 위원장이 등장하는 것은 북한이 그 다자주의 질서의 주요한 주인공을 맡겠다는 의미가 있다. 북한은 29일 노동신문과 관영 라디오 조선중앙방송을 통해 김 위원장의 중국 전승절 행사 참석을 주민들에게도 알렸다. 김 위원장이 약 6년 반 만에 방중을 결정한 것은 현재의 국제정세 변화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외교적 공간이 열렸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일·한미 정상회담을 ‘무사히’ 마무리한 우리 정부는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회담에서 ‘피스 메이커와 페이스 메이커’로서 북한과 대화 재개를 추진하겠다고 한 것을 바탕으로 북한과의 대화의 장을 열기를 원한다.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은 28일 기자간담회에서 김 위원장의 중국 열병식 참석을 “정부는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다”면서 “이번 한미정상회담도 이런 영향이 기초로 깔려 있다. 우리가 잘 된 것들을 이쪽(북한과 중국)의 움직이는 흐름에 대한 연장선에서 해석해 볼 여지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강 실장의 설명대로면 이 대통령은 김 위원장의 방중 계획을 사전에 알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미 대화를 요청한 셈이 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25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에게 “김정은과 매우 좋은 관계를 맺어왔다. 올해 만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정부는 오는 10월 31일~11월 1일 경북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트럼프 대통령이 참석하면 이를 계기로 북미 또는 남북미 대화를 추진하고자 한다.
2015년 중국 전승절 70주년 열병식에 참석한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베이징 천안문 망루에 서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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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북한은 철저하게 한국을 배제하고, 비핵화가 아닌 핵보유국 지위 인정을 전제로 미국과 마주 앉겠다는 뜻을 밝혀왔다.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지난 7월 담화에서 북미 정상회담 가능성과 관련해 “북한이 불가역적인 핵보유국 지위와 능력을 갖췄으며, 지정학적 환경도 근본적으로 변했다는 엄연한 사실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여정 부부장은 지난 20일 담화에서 “국제지정학적 상황을 우리의 국익에 유리하게 조종해나갈 데 대한 김정은 동지의 대외정책 구상을 전달했다”고 밝혔는데, 열병식 참석 결정과 관계된 내용으로 보인다. 이때 김 부부장은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명백히 하지만 한국은 우리 국가의 외교상대가 될 수 없다”며 “한국에는 우리 국가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지역외교 무대에서 잡역조차 차례지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중국 전승절 열병식에 우원식 국회의장이 참석하지만, 김 위원장과의 의미 있는 소통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하기 어려운 이유다.
정부도 이런 북한의 의도를 파악하고 대책을 고심하는 듯 보인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29일 시비에스(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지금은 북한이 우리는 물론 미국과 대화도 하려는 의지를 내비치지 않는 상황이 아니냐”며 “북한은 지금 굉장히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기 때문에 우리가 너무 기대치를 높여 얘기하는 것이 북한의 호응을 유도하는 데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위 실장은 김 위원장이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올 가능성에 대해서도 “낮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위 실장은 김 위원장이 중국 전승절 기념행사에 참석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꽤 주목을 요하는 상황 진전”이라며 “거기서 북중 정상회담도 있을 수 있고 북러 정상회담도 있을 수 있고, 또 다른 포맷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고 있다”고 말했다. 북·중, 북·러 정상회담이 열리는 것과 북·중·러 3자 정상회담은 의미가 다르다. 북·중·러 3자 정상회담이 열린다면 한·미·일 협력에 맞선 북·중·러 밀착이 강화된다는 신호이기 때문에 한국의 부담이 더욱 커진다. 위 실장도 “그렇게 되면 (국가) 그룹별 분열선이 심화하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북·중·러 3자 정상회담 가능성을 비롯해 중국이 이번 열병식과 김 위원장 초청을 통해서 한국에 보내는 신호도 한국에 큰 외교 과제다. 중국과 북한이 김 위원장 전승절 참석을 상당히 오래 전부터 준비해온 것으로 보이지만, 발표 시점은 한미 정상회담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이 대통령이 한·미 동맹과 한·미·일 협력을 강조하고 ‘안미경중(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태도를 취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고 언급한 직후 중국과 북한이 북·중·러 협력으로 맞불을 놓는 모양새가 됐다. 미국과 중국 모두 국제질서 장기판 위에서 한국을 바라보고 있다. ‘한·미 동맹을 중심으로 하면서 중국과의 관계를 잘 관리해 나가겠다’는 이재명 정부의 외교 좌표가 시험대에 서게 됐다.
박민희 선임기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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