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설서 美 겨냥 발언 쏟아내
“인류 평화·전쟁중 선택해야
중국이 운명공동체 이끌것“
평화 중재 스텝 꼬인 트럼프
SNS에 가시 돋친 축전 띄워
3일(현지시간) 중국 수도 베이징에서 열린 열병식. [신화 =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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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3일 개최한 제2차 세계대전 승전 80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북·중·러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세계를 상대로 사실상 ‘무력시위’에 나서면서 가뜩이나 불안한 아시아 지정학 패권에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열병식에 함께 등장한 반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 출범 이후 한국과 일본, 유럽연합(EU) 등 미국 동맹국은 관세와 방위비 분담 등 압박을 받고 있어 연대에 균열이 발생했다.
시 주석은 이날 푸틴 대통령, 김 위원장 등 26개 우방국 정상이 참석한 ‘중국인민 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전승절) 80주년’ 열병식에서 중국의 리더십과 자신의 권력이 건재함을 확실하게 과시했다.
시 주석은 이날 열병식 연설에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은 막을 수 없다”며 “인류 평화와 발전이라는 숭고한 대업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전국 각 민족 인민은 중국공산당의 강력한 영도 아래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이론, ‘3개 대표 사상’과 과학적 발전관을 견지해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을 전면적으로 수행하고 중국식 현대화 추진에 분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는 마르크스·레닌, 마오쩌둥, 덩샤오핑의 뒤를 ‘시진핑 사상’이 이어간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일 뿐 아니라 열병식이라는 상징적인 행사에 자신의 사상을 직접 언급함으로써 중국공산당 내에서 권위를 공고히 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80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시 주석의 부인 펑리위안 여사,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앞줄 왼쪽 열한째부터) 등 주요 내빈이 망루에 오르기 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타스 =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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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병식 좌석 배치에서도 시 주석의 건재함이 묻어났다. 이날 시 주석의 좌측에는 김 위원장과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이 자리했다. 이 위치는 10년 전 열병식 때 장쩌민·후진타오 전 국가주석이 서 있던 자리다. 중국공산당 전직 지도부가 아닌 해외 정상을 배치한 것은 10년 새 시 주석에게 당 권력이 집중됐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미국과 서방세계를 특정하진 않았지만 시 주석의 이날 연설과 북·중·러 결속 모습은 가뜩이나 동맹을 상대로 거래적 관계를 강화하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균열적 행보에 시달리는 아시아와 유럽 국가들에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오는 게 현실이다.
북·중·러 정상이 열병식에서 우의를 다지는 모습과 달리 당장 한국과 일본은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과 방위비 증액 압박 등에 곤란을 겪어야 했다. 이재명 대통령과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 모두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마치긴 했지만, 이후 구체적 사안을 두고 실무 단계에서 입장 차를 보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 집무실에서 발언하고 있다. [EPA =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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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통령은 평소 “동맹들이 더 나쁘다”면서 한·일·EU 등 동맹국이 미국을 이용해왔다는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을 ‘머니 머신’이라 칭했고, 일본에 대해서는 “버릇이 잘못 들었다(spoiled)”며 비판했던 바 있다. 더군다나 한국과 일본 간 역사 갈등은 언제 다시 촉발할지 모르는 민감한 문제인 만큼 결속력 측면에서 북·중·러에 비해 취약하다는 평가가 많다.
특히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북·중·러에 대한 미국의 압박이 ‘모호’해졌다는 점은 뼈아픈 대목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시 주석, 푸틴 대통령, 김 위원장과 친분을 과시해왔고 이는 미국 국무부·국방부의 압박 강화 정책과 종종 ‘엇박자’를 냈다. 불과 보름 전 트럼프 대통령에게서 극진한 환대를 받았던 푸틴 대통령이 이날 열병식에서 시 주석, 김 위원장과 나란히 등장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는 불편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3일 중국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열린 중국 ‘전승절’(항일전쟁 및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80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공중 퍼레이드가 펼쳐지고 있다. [사진 =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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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을 ‘뉴클리어 파워(비공인 핵보유국)’라고 지칭하곤 했다. 비록 이것이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할지라도 핵보유를 기정사실화하는 뉘앙스의 발언인 만큼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 입장에서는 매우 불편한 표현이다.
그는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트루스소셜에 “시 주석과 훌륭한 중국 국민이 위대하고 오래도록 기억될 축제의 날을 보내기를 바란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중국과 함께 미국을 상대로 음모를 꾸미는(conspire against) “푸틴과 김정은에게도 따뜻한 안부를 전해달라”고 강조했다. 전승절 행사가 막 시작했을 때 트럼프 대통령은 이 글을 올렸다.
시 주석에 대한 ‘축전’의 틀을 갖췄지만 실질은 북·중·러 정상이 결집하는 모습에 불편한 감정을 감추지 않은 것이다. 트루스소셜 메시지를 노출하기 전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취재진에게 북·중·러가 밀착하는 것에 대해 전혀 우려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2일 저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성 보도국은 김정은 동지께서 9월 2일 현지시간으로 오후 16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 베이징에 도착하시였다”고 보도했다. 이날 통신이 발행한 사진을 보면 김 위원장의 딸 주애도 동행했다. 2025.9.2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
그런데 김 위원장이 자신의 딸 김주애를 데리고 방중해 중국 열병식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키우자 트럼프 대통령은 ‘음모’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불편한 내색을 한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시진핑의 퍼레이드는 중국이 다시는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며 “푸틴 대통령이 참석한 베이징에서의 무력시위는 중국이 외세 압력에 저항할 만큼 강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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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정부는 이날 열병식 상황을 주시하면서도 특별한 반응을 표출하지 않는 로키(Low-key)로 대응하고 있다. 이 대통령이 유화책을 이어가고 있는 데다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한반도 평화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이날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김 위원장의 방중은) 대통령실에서 특별한 평가는 없다”며 “한반도를 비롯한 국제 정세가 워낙 복잡해 우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주변 국가들에 대해선 늘 면밀히 살펴보고 있다”고 말했다.
[베이징 = 송광섭 특파원 / 워싱턴 = 최승진 특파원 / 서울 = 성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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