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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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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당 통합, 민주화 실천의 기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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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삼 前 대통령 서거 10주기 세미나 발제문

    조선일보

    오인환 전 공보처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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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삼, 김대중이 이끄는 쌍끌이 민주화 투쟁은 군부 독재의 종식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 국민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쳐 국민의 희망은 실망으로 뒤바뀌었다. 양김이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고 분열되는 바람에 민주화 실현 기회가 무산되었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사망했을 때가 최초의 민주화 실현 기회였다. 권력의 공백에서 오는 혼란 속에서 양김은 각자 모처럼 찾아온 대권 행보에 바빴다. 야권 단일화를 요구하는 여론을 외면했다.

    12·12 군부 쿠데타로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선동 연설을 앞세우고 전국적인 조직 강화에 나선 김대중을 주목하고 있었다. 5월 17일 비상 계엄령을 내리면서 김대중을 구속(내란 음모 등의 혐의 조작)하고 김영삼을 가택 연금했다. 다음 날 일어난 광주 민주화 항쟁을 유혈 진압한 신군부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간접 선거로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켜 7년간 군부 독재를 계속했다.

    7년 뒤인 87년 6월 학생·시민·중산층의 궐기로 쫓기던 5공은 돌파구로 6·29 선언을 통해 직선제를 수용했다. 두 번째로 민주화 실현 기회가 온 것이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양김이 단일화를 이룰 수 없는 복합적인 숙명적 관계인 점을 꿰뚫어보고 직선제 카드를 택했다고 했다. 양김이 모두 출마하면 직선제로라도 노태우에게 승산이 있다는 계산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김은 전두환·노태우의 속임수 같은 술수를 읽어내지 못했다. 여론은 서울의 봄 때처럼 민주화 투쟁을 주도한 YS로 후보 단일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 우세했으나, DJ 측은 호남과 진보 세력의 지지를 바탕으로 잠재력을 확산해 반전시키겠다면서 끝까지 단일화에 응하지 않았다.

    대통령 선거에서 어부지리의 노태우가 36.6% 득표로 당선되었다. 양 김은 55%(YS 28.4% DJ 27.0%)의 득표로 득표율에서 이기고도 민주화 실현의 장애물이 되는 처지가 되었다.

    문제의 심각성은 그 같은 민주화의 딜레마가 선거 때마다 반복될 수 있다는 데에 있었다. 보수대연합론이 부상했고, 노태우의 민정당, 김영삼의 민주당, 김종필의 공화당 등 3당이 통합해 민자당을 출범시켰다.

    그 전망은 낙관적이지 않았다. 이렇다 할 전국적인 인물이 없는 민정계는 민주계의 선명 야당성을 내각제로 가기 위한 불쏘시개로 이용할 속셈이었고, 민주계는 민정계를 직선제를 위한 마중물로 보는 동상이몽의 관계였기 때문이다.

    한 지붕 세 가족의 민자당은 시작부터 주도권을 잡기 위한 신경전에 들어갔다. 내각제 각서 파동이 일어났다. 3당 통합의 원안은 내각제를 택해 여·야 보수 정권을 출범시키자는 것이었다. 직선제 주창자인 YS는 일단 창당에 응하고, 나중에 국민 여론을 보아 입장을 최종 정리할 생각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노태우 측이 약속 위반이라면서 내각제 각서의 존재를 먼저 폭로하고 나선 것이다. 처음에는 YS가 허를 찔린 듯했으나, 그 같은 폭로 행위가 상대를 고사시키려는 정치 공작이라고 반격하면서 여론이 바뀌어 갔다.

    직선제의 6·29 선언 당사자인 노태우가 군부 통치를 사실상 연장시키려고 내각제 꼼수를 쓰는 것이 아니냐는 역풍이 일어난 것이다. 여론에 일방적으로 밀리게 되자 노태우가 “더 이상 내각제를 논의하지 않겠다.”면서 후퇴했고, YS는 기선을 잡게 되었다.

    노태우는 정보 정치의 전문가라 할 수 있었다. 대위 시절 보안사에 근무하기 시작해 나중 보안사령관까지 역임했다. 박정희의 정보 공작 정치를 체득한 육사 11기의 대표적 정치 장교라 했다. 야생마 같은 YS를 길들일 수 있겠다는 자신감 때문에 3당 통합에 동의했을 그는 지금 정치 공작의 본산인 정보 기관들을 한 손에 쥐고 있는 대통령이 돼 있는 것이다.

    YS의 자질론 시비, 박철언의 인신공격, 노란 봉투(안기부의 기밀 보고서) 사건, 내각제 각서 폭로, 반YS의 노재봉 총리의 등장, 민정계 경선 후보들 사전 조정 등 끊임없는 노심(盧心)의 YS 견제로 점철된 YS의 당내 민주화 투쟁사에는 여러 가지로 공작 정치의 그림자가 깔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YS는 낙마하지 않고 싸우며 버티고 있었다. 53명의 민주계가 보인 충성심과 결속력이 버팀목이 되었고, 민정계 TK 세력과 수도권 의원들의 YS 지지가 큰 힘이 되었다. YS에 대한 꾸준한 여론의 지지(DJ보다 8~10% 우세)도 도움이 컸다.

    그러나 YS 개인의 경쟁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그는 박정희 이래 군부 독재와 싸워온 관록의 민주화 투사인 데다가 국민의 지지를 폭 넓게 받고 있는 강온겸비의 대중 정치인이었다. 위기에 대응하는 순발력과 승부욕을 앞세운 정치 수완이 절정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YS와 노태우의 대결은 국민의 눈에 민주화 투쟁의 새로운 버전으로 비추어졌고, 그에 따라 정국 주도권은 야당이 아니라 여당의 YS에게 오는 프리미엄이 생겼다.

    YS는 대선을 3개월 앞두고 최대 고비를 맞았다. 지난 총선 때의 관권 부정 선거가 폭로되고 여론이 나빠지자 중립 선거 관리 내각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해야 했다. 여당 후보가 야당처럼 행동한 것이다. 당시 총리가 평양에 가 있을 때이어서 발언의 타이밍도 나빴다.

    크게 노한 노태우는 공명 선거를 위해서라며 “민자당을 탈당하겠다”고 폭탄 선언을 내놨다. 기교의 노태우가 힘의 YS에게 늘 밀린다고 했는데, 결정적인 순간 치명적일 수 있는 반격을 가한 것이었다. 대통령의 탈당을 신호로 반YS계 민정계 중진 인사들의 동반 탈당이 잇달아 이어졌다. YS의 캠프가 얼어붙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YS는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침착하게 충격과 혼란을 수습해 나갔다. 퇴조하는 군부 추종 세력의 한계 탓 때문인지 폭탄 선언의 파괴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난 것이 YS에겐 불행 중 다행이었다.

    대선에서 YS는 평생의 라이벌 DJ보다 8%선인 93만여 표를 더 얻어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 독재를 빼고도 30여 년의 군부 독재 시대를 살아야 했던 한국에서 직선제에 의해 민간인 출신 대통령이 드디어 처음 탄생한 것이다.

    YS는 자신의 정부를 ‘문민정부’라고 불렀다. 3당 통합은 비관적인 전망 속에서 출발했으나, 어려운 당내 민주화 투쟁 과정을 거치며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박정희가 압축 성장으로 산업화를 성공시킨 데 이어 김영삼은 단축 성장으로 민주화를 완성시키면서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논평 : 민주화의 평화적 성취를 위한 김영삼의 인내 / 김봉조 민주동지회 회장

    조선일보

    김봉조 민주동지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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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평의 주제를 ‘민주화의 평화적 성취를 위한 김영삼의 인내’로 정한 것은, 김영삼 대통령의 정치 역정을 몇 마디로 축약할 때, ‘끝없는 인내’와 ‘과감한 결단’, 그리고 ‘강력한 투쟁’의 역사였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을 인(忍)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이 있다. 인(忍)이라는 글자는 뜻을 나타내는 ‘마음 심(心)’과 소리를 나타내는 ‘칼날 인(刃)’이 합쳐진 글자이다. ‘마음에 칼을 갈다’ 혹은 ‘마음에 칼날이 꽂히는 아픔을 참다’라는 뜻으로 풀이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므로 오늘 저는 김영삼 대통령이 이 나라의 민주화 성취를 위해 얼마나 긴 세월을 참고 인내했는지를 중심으로 몇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한다. 김영삼의 첫 번째 인내는, 우리 모두가 잘 알다시피, 엄혹한 정치적 탄압 시절 하에서도 ‘민주산악회’라는 정치 결사체를 결성한 일과 무려 23일간 목숨을 건 단식 투쟁으로써 비폭력 투쟁을 전개한 일이다.

    김영삼의 두 번째 인내는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그리고 김종필의 공화당 등 3당을 통합해 민자당을 출범시키는 일을 주도적으로 해낸 일이다. 그리고 김영삼의 세 번째 인내는 3당 합당 후 노태우 당시 대통령을 중심으로 민정계가 김영삼을 몰아내기 위한 당내 투쟁을 벌인 과정에서 온갖 굴욕을 인내하면서 끝까지 싸워서 이겨낸 일이다.

    김영삼의 이와 같은 ‘인내정신’이 결국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됨으로써 민주화의 꽃을 피웠다. 김영삼의 이와 같은 각고의 인내가 없었더라면 대한민국의 평화적 민주화 성취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김영삼의 그 어떠한 면모보다도 갖은 수모를 참고 견뎌 온 ‘인내정신’에 존경의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의 공과에 대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고자 한다.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적인 3대 치적은 첫째, 군 사조직 ‘하나회’를 해체한 일이다. 김영삼 대통령이 하나회를 해체하지 않았더라면 문민정부 후 김대중정부를 포함한 민주정부의 평화적 지속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둘째, 금융실명제 실시이다. 김영삼 대통령이 금융실명제를 실시하지 않았다면 이 나라에 만연해오던 온갖 정치적 부정부패는 지속됐을 것이다. 셋째, 지방자치제 실시이다. 김영삼 대통령이 지방자치제를 실시하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지방자치화시대는 없었을 것이다.

    끝으로, 김영삼에 대하여 잘못 평가되고 있는 점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한다. ‘김영삼 대통령’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이 ‘1997년의 IMF 외환 위기’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1997년의 IMF 외환 위기’는 한국만의 일이 아니라, 일본과 대만을 제외한 동남아시아의 모든 나라에 공통으로 폭풍처럼 불어닥친 총체적 경제난국이었다. 한국의 경제 발전이 일본이나 대만처럼 외국 자본 유출을 막을 만한 수준에까지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모든 동남아 국가들처럼 위기를 당했던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역사에 남을 엄청난 치적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국제적인 현상으로 발생한 IMF 때문에 그 업적이 저평가되고 있는 것은 매우 부적절한 일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이룩한 ‘최상, 최고의 대통령’으로 정당하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하루속히히 바로 잡히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논평을 마치기에 앞서, 본인의 마지막 정치적 소망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한다. 첫째, 앞으로 어느 정당에서든 김영삼 대통령의 정신을 잇는 정치 후계자가 나와서 김영삼에 대한 평가가 올바로 이루어지고, 그 치적이 우리의 역사 속에 올바로 기록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둘째, 본인은 김영삼대통령이 만드신 『민주동지회』의 회장으로서 『김영삼아카데미정치학교』를 설립하여 김영삼 정신을 이어갈 정치 지도자 양성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김영삼아카데미정치학교』를 통해 김영삼정신을 이어갈 젊은 정치 지도자를 양성하는 일에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의 끝없는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린다.

    [오인환 전 공보처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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