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요르단강 서안지구 베들레헴에서 마르완 바르구티의 초상화가 그려진 장벽 옆을 남성들이 걷고 있다. 초상화엔 아랍어로 ‘우리는 곧 다시 만날 것이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AFP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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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화장품 제국 ‘에스티 로더’를 만든 로더 가문의 상속자 로널드 로더(81). 6조원의 자산을 가진 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오랜 후원자이자,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도 오랫동안 친분을 맺어온 보수 성향의 유대인이다. 세계 유대인 의회 의장으로 국제 유대인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도 막강하다. 그런 그가 최근 한 팔레스타인 인사를 석방시키기 위한 로비를 벌여, 유대인 사회를 술렁이게 했다. 그가 석방을 요구한 인물은 ‘팔레스타인의 만델라’,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수감자’라 불리는 마르완 바르구티였다.
마르완 바르구티는 23년간 이스라엘 감옥에 수감 중인 팔레스타인 지도자다. 수감 전인 1990년대 후반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를 주도하는 세속주의 정당인 ‘파타흐’의 서안지구 사무총장을 맡았다. 당시 지도자인 야세르 아라파트의 후계자로 여겨졌다. 바르구티는 ‘2차 인티파다(민중봉기)’(2000~2005년) 당시 이스라엘인 5명을 살해한 4건의 사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혐의로 2002년 체포됐다. 법원은 누적 종신형 5회에 더해 40년형을 선고했다. 바르구티는 혐의를 부인하고, 자신이 이스라엘 법원의 재판 대상이 될 수 없다며 변론을 거부해 그대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오랜 수감 생활에도 그는 팔레스타인 민중에게 점점 더 높은 지지를 받아왔다. 팔레스타인정책여론조사연구소(PCPSR)가 팔레스타인 주민을 대상으로 진행해온 여론조사에서, 바르구티는 조사가 시작된 2012년부터 51차례의 3자 대결에서 여섯번을 제외하고 모두 가장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2006년부터 가자지구를 통치해온 하마스의 지도자나 2005년부터 서안지구를 대표해온 마흐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보다 높은 인기를 구가해온 것이다. 그는 어떻게 팔레스타인 민중의 신뢰를 받는 것일까?
바르구티의 아들 아랍 바르구티(35)는 지난 9월 영국 언론인과 인터뷰에서 아버지의 높은 지지율의 이유를 묻는 질문을 받았다. 이 질문에 아랍은 ‘희생’ 때문이라고 답했다. 팔레스타인 남성의 40%가 체포나 구금을 경험하는 현실에서, 투옥과 암살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운 바르구티와 수감 경험조차 없는 부패하고 무능한 아바스 수반이 어떻게 경쟁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89살인 아바스는 2005년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대통령 임기를 무기한 연장하고 선거를 열지 않으면서 20년 넘게 독재 정치를 펼치고 있다. 아바스의 가족들은 권력을 이용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등 부패 의혹도 적지 않다. 심지어 2024년 인질 교환 협상 과정에서 아바스 수반은 카타르 중재자들에게 바르구티의 이름을 석방 후보에서 빼달라고 요청했다고 이코노미스트가 보도했다. 바르구티가 2002년 재판정에 나와 “만약 나의 부자유가 팔레스타인 인민들의 자유의 대가라면 기꺼이 그 값을 치르겠다”고 한 말이 여전히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겐 울림이 있다고 아랍은 전했다.
여러 정파가 갈등을 빚는 데 지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바르구티는 ‘통합의 상징’이라는 점도 호소력 있다고 아랍은 짚었다. 바르구티는 2006년 감옥에서 하마스, 이슬람 지하드 등 5개 주요 정파의 대표 수감자들을 모아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의 방향을 담은 ‘수감자 문서’를 작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2006년 하마스가 의회 선거에서 승리하며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이끄는 파타흐와 긴장이 높아진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이 문서는 팔레스타인 정파들이 모두 서명한 유일한 문서다.
하마스가 지난달을 포함해 2년간의 가자전쟁 동안 있던 여러 차례의 휴전 협상 과정에서 바르구티의 석방을 주요 요구안으로 올린 것도, 단지 그의 명성 때문만은 아니다. 2023년 가자전쟁을 시작한 책임을 일정 부분 져야 하는 하마스가 전후에 정치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선 바르구티가 만들 ‘국민 통합 정부’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2002년 8월14일 이스라엘 텔아비브 법정에 나온 마르완 바르구티가 수갑을 찬 손을 들어 보이고 있다. AP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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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정치인 중에서도 바르구티라면 좋은 대화 상대가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1996년 바르구티는 첫 팔레스타인 의회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됐다. 1993년 오슬로 협정 이후 서방의 주도로 활발하게 열린 평화회담 국면에서, 바르구티는 이스라엘 정치인들과 교류하며 친분을 쌓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정부에서 7차례 장관직을 맡은 메이르 시트리트(77)는 과거 이탈리아에서 열린 평화회의 중 병을 얻었을 때, 바르구티가 밤새 병상 곁을 지켜준 일을 기억한다. 시트리트 전 장관은 “당시 우리는 정말 가까워졌다”며 “그는 이스라엘과의 평화를 전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2023년 하마스의 침입과 인질 납치 이후 이스라엘에서 우경화 경향이 강해지면서, 바르구티의 석방 전망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 이스라엘 사상 가장 극우적인 내각을 이끄는 네타냐후 총리는 지난 9~10월 하마스와 진행한 인질 협상에서 하마스와 로널드 로더가 요청한 바르구티 석방을 거부했다. 로더는 인질 교환이 아닌 바르구티의 석방을 요청해온 사우디아라비아 등 아랍 국가들에 응답하는 형식이 되어야 하며, 바르구티를 국외로 추방해야 한다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네타냐후 총리는 극우 내각의 반발로 인한 연정 붕괴와 팔레스타인 내에서 바르구티를 중심으로 한 국가 수립 운동이 급격히 일어날 가능성에 대한 우려 등으로 석방을 거부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우려 때문에 바르구티가 석방 뒤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우기 위해 무기를 들 것인가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정부 기관의 중요한 관심사다. 바르구티는 2016년 대규모 시민 불복종 운동과 시위로 해방을 쟁취하는 ‘3차 인티파다’가 필요하다는 문서를 작성한 바 있다. 그를 잘 아는 인물들은 바르구티는 본래 군인이 아닌 정치가라는 점을 든다. 카두라 파레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전 장관은 “그는 증오와 복수심이 아니라 목표에 이끌리는 사람”이라며 “그는 이스라엘과 이 작은 땅에서 함께 살아갈 길을 찾아야 한다는 걸 늘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반면 바르구티와 친분이 있는 이스라엘 국내 정보기관 신베트의 간부 아부 파라는 “그는 아주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면서도 “그래도 어떻게 테러리스트였던 사람을 팔레스타인 대통령으로 세울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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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경화되는 이스라엘에도 바르구티의 석방과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이 끊임없는 분쟁을 종식시키고 이스라엘 국민을 안전하게 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아직 남아 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 560만명에 대한 아파르트헤이트(인종 분리 차별) 정책을 유지하는 한, 팔레스타인의 저항, 같은 이슬람교도인 아랍 국가들과의 갈등, 국제사회의 반발이란 증오와 폭력의 악순환을 빠져나올 수 없단 것이다. 지난해 1월 신베트의 전 수장이자 전 노동당 국회의원인 아미 아얄론(80)은 이스라엘 매체 하아레츠와의 인터뷰에서 ‘끝없이 전쟁을 하더라도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우게 해선 안 된다’는 이스라엘인들을 두고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메시아주의자(광신주의자)들”이라고 비판했다.
아얄론은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이 “우리를 안전하고, 민주적인, 유대인의 이스라엘로 인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바르구티는 선거에서 지지를 얻어 이스라엘과 상호 합의된 분리의 길로 단결되고 합법적인 팔레스타인 지도부를 이끌 수 있는 유일한 팔레스타인 지도자”라며 “바르구티를 석방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트리트 전 장관도 “내가 결정할 수 있다면 그를 풀어줄 것이다. 그가 이스라엘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울 기회를 주겠다”고 말했다.
만델라는 수감 27년 만인 72살에 풀려나 4년 뒤 대통령이 됐다.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이란 팔레스타인 민중의 염원을 이룰 수 있는 시간이 66살의 바르구티에게는 얼마나 남아 있을까.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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