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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8 (월)

    가정용 전기요금 한국의 3배… 난방 못하고 냉장고 끄는 영국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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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의 신화가 저문다] ②에너지 정책 실패한 영국

    조선일보

    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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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동북부 체셔에 사는 린지(62)씨는 천식과 우울증을 앓지만 집은 늘 꽁꽁 얼어붙어 있다. 라디에이터가 고장 났지만, 고칠 생각조차 없다. 2022년 이후 치솟은 전기 요금 때문이다. 대신 그녀는 소파에 웅크린 자세로 누워 두꺼운 점퍼 목깃을 턱까지 끌어올린 상태에서 하루를 버틴다. 습한 날씨에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아 방구석에 곰팡이가 피어있다. 서부 글로스터셔에 살면서 생후 6개월 된 아이가 있는 베서니 워커씨는 아이를 씻길 때를 빼면 온수를 거의 쓰지 않는다. 영국 BBC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미납 요금이 쌓여 있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난방 끊고 내복 입고 겨울 난다

    중산층도 내핍 생활을 강요당한다. 몇 해 전 런던을 떠나 동부 노퍽의 한 시골에 정착한 플로라 왓킨스(47)씨는 취사뿐만 아니라 난방에도 쓰이는 스토브를 켜지 않기로 했다. 한 달 전기 요금이 400~500파운드(77만~96만원)에 달하기 때문이다. “낮에 중앙난방을 전혀 켜지 않은 지는 오래됐고, 11월부터 4월까지는 내복을 껴입고 산다”고 텔레그래프지에 토로했다. 다니던 마트도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 웨이트로즈에서 초저가 할인점 리들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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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김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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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이 되면서 영국 언론들은 난방을 끊고, 추위에 떨며 지내는 사람들을 다루기 시작했다. 이 나라는 전기 요금이 세계에서 가장 비싸다. 게다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천연가스(LNG) 가격이 치솟자 전기 요금도 뛰었다. 2015년 평균적인 가구가 내는 전기 요금은 연 540파운드(104만원·3400kWh 사용 기준)이었다. 2023년 1213파운드(234만원), 지난해 1067파운드(206만원)으로 급등했다.

    ◇원자력·석탄 포기한 정책 실패가 원인

    정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소비자용 전기 요금은 킬로와트시(kWh)당 30.5펜스(100펜스=1파운드·585원)로 28개 선진국 가운데 독일(33.5펜스) 다음으로 높았다. 미국(12.9펜스)의 2.4배, 한국(10.2펜스)의 3.0배 수준. 산업용 전기 요금(kWh당 26.6펜스)은 독일(21.0펜스)보다 1.3배, 한국(11.0펜스)보다 2.4배 비쌌다. 상승 폭도 문제다. 2020년 대비 영국의 소비자용 전기 요금 상승률은 77.0%로 조사 대상 국가 중위 요금 상승률(25.2%)의 3배 이상이다.

    한때 값이 쌌던 자국산 LNG에 ‘취해’ 원자력, 석탄 등을 포기한 정책 실패가 원인이다. 1990년 영국 전체 발전량의 71.9%는 석탄, 19.8%는 원자력에서 나왔다. 지난해에는 각각 LNG가 30.4%, 풍력 및 태양광이 34.3%, 원자력이 14.2%. 석탄 발전을 LNG로 대체하면서, 비싼 LNG 발전 비용이 그대로 전기 요금을 결정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북해 유전이 마르기 시작하면서 수입 비율도 49.0%로 치솟았다. 다른 유럽 국가는 원자력(프랑스), 석탄(독일) 등의 비율이 여전히 높다. 또 초고압 송전망으로 인접국의 싼 전력을 수입하기도 한다.

    조선일보

    영국 북해의 해상 풍력 발전 단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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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상 풍력 늘렸지만 역부족

    북해의 풍부한 바람을 이용해 해상 풍력을 늘렸지만, 저렴하고 안정적인 공급과는 거리가 멀다. 날씨 영향이 커 바람이 잔잔해지면 이내 전기 요금이 오른다. 수요처와 발전소가 멀리 떨어져 있어 대규모 송전망 건설이 필요한데 투자는 지지부진하다.

    난방비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름에는 냉장고 전체 또는 일부를 끄는 가구가 6%에 달한다. 음식을 제대로 조리하지 않는 경우도 많아졌다. 식중독 환자가 늘 수밖에 없다. 전기 요금에 식비를 줄이는 경향도 뚜렷해졌다.

    산업 경쟁력도 치명타를 입었다. 영국을 대표하는 도자기 회사인 로열스태퍼드는 지난 2월 문을 닫았고, 포트메리온은 올 상반기 200만파운드 손실을 보았다. 2021~2024년 석유화학 산업은 40.2%, 금속 산업은 46.5% 생산이 감소했다. 데이터 센터를 운영하는 데 대규모 에너지가 필수인 AI 산업도 위기라는 진단도 계속해서 나온다.

    남의 손으로 짓는 원전, 비용도 폭증

    - SOC 건설 역량 총체적 부실

    - 도로·철도·공항·수도 공급 부족

    2017년 3월 첫 삽을 뜬 뒤 비용은 2.6배 늘고, 완공일도 계속 늦어지는 힝클리포인트C 원자력발전소 프로젝트는 영국 SOC 건설 역량의 총체적 부실을 압축해 보여준다. 프랑스 전력공사(EDF)가 잉글랜드 서부 서머싯에 차세대 유럽형 가압 경수로(EPR) 2기를 짓는 사업으로, 올해부터 가동에 들어가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2030~2031년으로 완공일이 늦어졌다. 180억파운드(약 34조6000억원)로 예상한 비용은 최대 460억파운드(약 88조6000억원)로 뛰었다.

    문제의 발단은 EDF의 신형 원전(EPR)이 기술적으로 불완전한 결함투성이라 계속 설계가 변경됐다는 점이다. 현지 규제에 맞춰 바꾼 설계도 7000곳이다. 그런데 영국은 1995년 이후 원전 건설에 손을 떼 기술 평가나 사업 감독을 할 역량이 부족하다. 인력난도 심각하다. 수십 년간 원전 해체만 신경 쓰다 보니 건설 사업을 맡을 엔지니어가 없다. 고숙련 용접공은 영국 전체에 5000명에 불과하다.

    다른 대형 SOC 사업도 사정은 비슷하다. 런던~버밍엄~맨체스터~리즈를 잇는 HS2 고속철도 사업은 2012년 330억파운드로 예상한 사업비가 1000억파운드를 돌파하자, 런던~버밍엄 구간(1단계) 이후 계획이 모두 취소됐다. 1단계 노선의 ㎞당 비용은 이탈리아의 4배, 프랑스의 8배 수준. 데이비드 히긴스 전 HS2 회장은 “독일, 스페인 등과 비교해 R&D와 전문 인력에 투자할 수 있는 대형 회사가 부족하고 하도급만 가능한 중소기업으로 잘게 나뉘어 있다”고 지적했다.

    이렇다 보니 도로, 철도, 공항, 수도 등 SOC가 만성적으로 부족하다. 런던 히스로공항은 2000년부터 항공편을 늘리지 못하고 있다. 1992년 이후 새로 지은 저수지가 없어 상수도 공급마저 위태로운 지경이다. 부족한 SOC가 경제성장은 물론 삶의 질의 발목을 잡고 있는 셈이다.

    ‘아파서 일 못 해요’ 폭증… 노동력 부족 심화

    “‘유럽의 병자’라는 표현은 경제 상황이 좋지 않고 사회적 불만이 높은 나라를 가리키는 비유였으나, 현재 영국은 문자 그대로 ‘병자’가 됐다.”

    지난해 영국 공공정책연구소(IPPR)는 보건의료 실태를 다룬 보고서에서 이렇게 개탄했다. 아파서 일하기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빠르게 늘고 있어서다. 불평등 심화, 불량한 주거 환경 등 생활 여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보건의료 시스템이 맞물린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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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양인성


    지난해 경제활동인구(15~64세) 중 오랫동안 아파서 일자리 찾기를 포기한 사람은 300만명(노동력 조사·LFS 기준)으로 사상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경제활동인구의 7.0%에 달한다.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직전인 2019년(220만명)과 비교하면 36.4% 증가했다. 성인 인구는 조금씩 늘지만 만성질환자가 늘어나면서, 투입 가능한 노동력은 줄어들고 있다. IPPR은 “영국은 G7 국가 가운데 코로나19 이후 고용률이 이전 추세로 돌아가지 않은 유일한 국가”라고 지적했다. 우울증·불안 등 정신질환과 근골격계 질환 비율이 높다. 절반 이상이 3개 이상 질환을 앓고 있다.

    핵심 원인은 불평등 확대다. 건강보험 NHS의 한 고위 인사는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극빈층 지역은 거의 중세 수준으로 치료를 못 받고 방치되는 사람들이 있다”고 토로했다. 옴(기생충 피부 감염), 구루병(영양실조에 따른 뼈 발육 장애), 성홍열(아동 전염병) 등 선진국에서 사라진 질환도 다시 고개를 든다. 난방과 단열이 되지 않고 곰팡이가 낀 집, 가난에 무너진 영양 상태도 문제다. 병원들도 예산과 인력이 부족해 충분한 치료를 제공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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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귀동 경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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