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관 에버랜드 주키퍼 |
매년 이맘때쯤이면 마음속 한구석에 간절히 기다리는 풍경이 있다. 바로 온 세상이 새하얀 눈으로 뒤덮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마법 같은 순간이다. 그 눈밭 위를 뛰노는 동물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차가운 겨울 공기마저 따뜻해지는 것만 같다. 겨울이 오면 특히 '눈과 함께하는 동물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이유이다.
그 동물들 중에서도 내게 각별히 떠오르는 존재가 있다. 바로 북극여우이다. TV나 인터넷에서 보던 북극여우는 늘 하얀 털을 지닌 모습이었는데, 실제로 20여 년 전에 처음 만난 북극여우는 흰색과 회색이 섞인 털을 가지고 있어 무척 당황스러웠다. 알고 보니 북극여우는 여름에는 회색빛을 띠며 툰드라 환경에 녹아들고, 혹독한 겨울이면 순백의 털로 갈아입어 눈밭 위에 몸을 숨기며 계절에 따라 털 색깔을 바꾸는 것이었다. 익숙한 이미지와는 달랐지만, 그것 역시 자연이 북극여우에게 건넨 삶의 지혜란 생각이 들었다. 북극여우의 이 하얀 털은 단순히 눈 속에서 몸을 숨기는 위장술에 그치지 않는다. 영하 50도까지 내려가는 혹독한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두껍고 촘촘한 겨울옷이 되어주기도 하며, 뛰어난 청각으로 눈 아래 숨어 있는 먹이의 움직임을 감지한 후 마치 다이빙하듯이 눈 속에 머리를 박고 사냥하는 그들만의 독특한 생존 기술을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이 작고 영리한 북극여우에게는 더욱 놀라운 겨울나기 전략이 있다. 바로 북극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인 북극곰과의 '기묘한 동행'이다. 이 거대한 동물 역시 온몸을 덮은 하얀 털로 완벽하게 위장하는 동시에, 털 아래 두꺼운 피하 지방층으로 영하 수십 도의 추위 속에서도 끄떡없이 체온을 유지한다. 크고 넓적하며 거친 패드로 뒤덮인 발바닥은 마치 천연 스노슈즈처럼 눈과 얼음 위를 미끄러지지 않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해준다. 북극여우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얻기 힘든 먹이를 얻기 위해 이 거대한 북극곰의 뒤를 끈질기게 쫓아다닌다. 북극곰이 사냥한 바다표범이나 물범 등 커다란 먹이를 다 먹고 떠나면, 북극여우는 남은 찌꺼기나 뼈까지 깔끔하게 처리하며 혹독한 겨울을 버텨낸다. 마치 거인의 그림자 아래서 삶의 한 조각을 얻어내는 작은 생명처럼, 서로 다른 종이지만 극한의 환경 속에서 생존을 위해 암묵적인 공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처럼 북극여우는 생존을 위해 때로는 협력자를 택하는 지혜까지 발휘한다.
눈을 삶의 터전이자 생존의 도구로 삼는 동물들은 이들 외에도 다양하다. 대표적인 예가 이름부터 겨울과 깊이 연관된 눈토끼는 겨울이 되면 털 색깔을 하얗게 바꾸어 눈밭에 완벽하게 녹아든다. 그들의 넓적한 발은 눈 위에 몸무게가 분산되어 마치 스노슈즈를 신은 듯 깊이 빠지지 않고 민첩하게 움직이며 포식자를 따돌린다. 눈토끼는 눈 속에 얕은 구덩이, 즉 '폼(form)'을 만들어 매서운 바람을 피하고 몸을 숨기기도 하며, 얼어붙은 나뭇가지나 나무껍질을 갉아 먹으며 긴 겨울을 활동적으로 이겨낸다. 흰족제비 또한 계절에 따라 털이 하얗게 변하는데, 꼬리 끝부분만은 까만색으로 남겨두는 독특함을 지녔다. 작고 날렵한 몸으로 눈 아래 숨어 있는 쥐나 들쥐 같은 작은 포유류를 집요하게 추적하며 사냥한다. 마치 눈밭 아래 펼쳐진 미로 속을 탐험하듯이 움직이며 혹한 속에서도 활발하게 먹이 활동을 이어 나가는 것이다.
혹독한 추위와 새하얀 눈밭이라는 고난 속에서도 자신만의 빛나는 지혜로 아름다운 삶을 이어가는 동물들의 모습은, 위기와 시련의 순간을 피하지 않고 마주할 때 오히려 한 뼘씩 성장하는 우리의 모습과도 닮아 있는 듯하다. 또 북극여우가 북극곰의 뒤를 쫓는 것처럼, 우리 역시 때로는 더 큰 존재의 지혜를 빌리고 서로에게 의지하며 겨울을 건너간다. 이처럼 자연이 건네는 삶의 지혜가 담긴 겨울 풍경이라면 늘 우리에게 많은 위로와 영감을 줄 것이다.
[송영관 에버랜드 주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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