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2.05 (금)

    [박홍주의 오프] 사소하게 사랑하는 사람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매일경제

    박홍주 사회부 기자


    사람들은 자신이 젊은 시절에 듣던 음악을 평생의 취향으로 간직한다고 한다. 뉴욕타임스가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 스포티파이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이용자가 재생을 가장 많이 한 음악은 13~16세를 중심으로 한 10대 무렵에 익숙해진 음악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지식과 경험이 평생에 걸쳐 쌓아올리는 벽돌이라면, 취향과 감각은 인생의 어느 한 지점에서 뜨겁게 가열한 뒤 정교하게 다듬어야 하는 쇳물에 가깝다.

    올해 극장가에서 인기를 끈 '체인소맨'의 작가 후지모토 다쓰키가 그린 단편 만화 '룩 백'은 어릴 때의 작고 단순한 열정이 인생을 어떻게 끌고 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작년에 1시간 남짓의 애니메이션으로 개봉하기도 한 이 만화는 내년에 실사 영화로도 개봉을 앞두고 있다. '룩 백'의 콘셉트는 이렇다. 학교 신문에 4컷 만화를 그리는 초등학생 후지노는 친구들 사이에서 그림깨나 그리는 아이다. 재기 있는 그림 솜씨에 '병맛 개그' 만화를 그리는 게 취미다. 그러던 어느 날 은둔형 외톨이 동급생 쿄모토의 그림 실력을 보고 좌절한다.

    그때부터 후지노는 세상을 등지고 스케치북 속에 파묻혀 실력을 갈고닦지만 쿄모토의 섬세하고 생생한 그림은 넘지 못할 벽 같기만 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가 돼서야 우연히 만난 쿄모토는 자신이 후지노의 팬이라고 고백하고, 둘은 만화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의기투합해 함께 성장한다. 만화는 그 뒤로 개인적인 아픔과 사회적인 비극을 한데 묶어 풀어내지만, 이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즉각적인 감동은 어린 시절에 누구나 겪었을 법한 순수한 열정과 욕심이다. 좋아하는 것을 좀 더 잘하고 싶은 마음에 온 시간과 정성을 계산 없이 털어넣는 마음일 것이다. 그림이든 수학이든 운동이든 또 다른 무엇이든, 우리가 마음을 내어준 것들은 우리의 미래를 영영 바꿔놓는다.

    연말을 맞아 음악 스트리밍 플랫폼을 켜면 올 한 해 가장 많이 들은 음악과, 장르와, 아티스트가 정리된다. 아니나 다를까 중고등학생 때 듣던 음악 또는 비슷한 스타일이 가장 많이 눈에 띈다. 중학생 때 같은 반 친구가 슬라이드 휴대전화의 조악한 음질로 들려줬던 빌보드 차트의 힙합 음악, 친구가 수십 장의 공CD에 구웠던 음악들, 희귀한 제3세계 음악을 찾아내기 위해 구글과 토렌트를 밤새 뒤지던 날들. 선명한 목표를 향해 달린 시간들보다 무용한 즐거움을 위해 갈팡질팡 표류한 시간들이 더 많이 기억에 남는다.

    물론 찰나처럼 짧은 어린 날의 기억과 취향에 매몰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취향을 넘어 가치관이나 태도까지 과거에 머무른 고루한 어른은 너무 많다. 그럼에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것(룩 백)은 어쩔 수 없다. 무엇 하나 미래를 약속해주지 않는 것들에도 기꺼이 마음을 내어줄 때 삶은 미세하게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사람은 자꾸만 뒤를 돌아보면서 앞으로 가는 구부정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영화 '화양연화'에는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는 대사가 나온다. 남김없이 지나갔기 때문에 비로소 화양연화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연말에는 늘 아쉬움과 좌절이 남기 마련이다. 무엇 하나 이룬 것은 없고, 앞날은 점점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그래도 괜찮을 것이다. 사소하고 무용한 것에 온 마음을 쏟을 수만 있다면 지금이 최고의 시간일지도 모른다.

    [박홍주 사회부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