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멜라 작가 |
어느덧 한 해가 저물어간다. 해를 돌아보며 애써 쥐고 있던 것은 놓아주고, 새해로 지니고 갈 기억은 씨앗처럼 간직한다. 크고 작은 바깥일은 그저 자연스러운 흐름에 내맡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나 자신을 향한 태도는 관대해지지 않는다. 올해 나는 마음의 질병처럼 자책하는 버릇을 떨쳐낼 수 없었다. 왜 나는 까닭 없이 자신을 미워하며 가혹하게 꾸짖는 걸까.
어려서부터 나는 엄마의 애정을 듬뿍 받았다. 같이 자란 언니가 소외감을 느낄 만큼 나는 사랑 받는 게 당연한 줄 아는 고집 센 응석받이였다. 성인이 된 지금도 오래 사귄 연인이 아낌없는 애정을 준다. 그런 내가 최근에야 나 자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타인이 주는 마음과 상관없이 나는 나에게 매정하다. 대단히 선하지는 않을지라도 모나게 나쁜 사람은 아닐 텐데, 스스로를 대하는 기준이 갈수록 혹독해진다. 나이가 들수록 타인을 향한 이해의 둘레는 넓어지고 소소하게 주고받는 진심도 깊어진다. 그런데 오직 나 한 사람에게만, 지켜주고 변호할 수 없는 나에게만 거리낌 없이 질책한다. 작가로서 내가 쓴 글에도 미흡한 점만 꼬집으며 박한 평을 내린다. 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비뚤어진 잣대를 버리지 못한다. 한없이 다독여주던 연인마저 깨진 독에 물을 붓는 것 같다며 하소연하기에 이르렀다. 예술과 창작이야말로 굴레 없이 자유롭게 노니는 것인데, 호시탐탐 회초리를 들고 지켜보는 내 시선에 짓눌려 생각이 굳고 가슴이 움츠러든다. 혼내는 것도, 무서워 떠는 것도 나 자신인 이 왜곡된 습관을 멈출 수 없을까.
찬바람이 불면서 나는 고요히 내 안의 중심에 다가갔다. 엄격한 심판자의 목소리를 끄고 단순하고 간결하게 내가 정한 규칙에 따라 소박한 일상을 보냈다. 조금씩 소란한 잡음이 가라앉고 내면의 균형추가 맞춰지면서 시야가 맑아졌다. 하루는 집 근처에서 옆집 아이를 마주쳤다. 봄까지만 해도 앳된 얼굴의 꼬마였는데 못 본 사이에 훌쩍 자라 소년이 돼 있었다. '내가 글에 골몰하던 사이 너는 건강히 자랐구나.' 잠깐 스친 그 모습이 참 뿌듯하고 대견했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길에서 마주친 작은 기쁨들이 있었다. 가을비 흩날리던 어느 오후, 우연히 엿들은 싱그러운 대화도 그중 하나였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두 명이 우산 하나를 받치고 걸어갔다. 두 친구는 녹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각자 손에 든 채 키득거렸다. 한 사람이 웃다가 비틀대며 친구에게 말했다.
"나 너무 웃어서 못생겨진 것 같아."
그 말에 나도 풋 하고 웃었다. 너무 웃어서 못생겨진 그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실례가 될지 몰라 무진 애를 쓰며 정면만 봤다. 그리고 와락 상쾌한 바람이 밀려오던 또 다른 기억이 있다. 한여름 정오의 해가 내리쬐던 날, 나는 탁 트인 광장을 걷고 있었다. 주위에 사람은 나뿐이었고 멀찌감치 비둘기 한 마리가 더위에 지친 듯 모퉁이에 앉아 있었다. 그때 맞은편에서 나이 지긋한 여자가 새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다쳤니? 괜찮아?" 놀란 비둘기가 푸드덕거렸고 뒤이어 여자가 서둘러 물러서며 사과했다.
"어머, 놀랐니? 미안해!"
그 말소리가 어찌나 좋은지 나는 이마에 빛이 켜진 듯 환하게 웃었다. 내 안에 얼어붙은 무언가가 부드럽게 풀리며 수증기처럼 상승하는 것 같았다. 마치 간지럼 태우듯 절로 몸을 배배 꼬이게 하는 한 모금의 다정함이었다. 아직 나를 미워하지 않는 뾰족한 방법은 모르겠다. 다만 삶은 되새기며 밝아질 수 있는 다른 이의 어여쁜 빛을 별처럼 드리워주었다. 여름내 자란 아이와 비 오는 날 아이스크림을 먹는 두 친구, 새를 걱정하는 여자가 저만치 멀어지는 2025년을 향해 작별의 손을 흔든다.
[김멜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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