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의 '해석의 한계'는 한 노예에 관한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한 노예가 무화과가 가득 담긴 바구니의 편지를 전하라는 임무를 받는다. 노예는 주인의 명을 어기고 열매를 거의 다 먹어 치웠고, 남은 열매 몇 알과 편지만 전달한다. 바구니를 받아 든 사람은 열매의 숫자가 적힌 편지를 읽은 뒤 노예를 책망한다.
며칠 뒤 노예에게 처음과 똑같은 지시가 내려진다. 하지만 노예는 마찬가지로 열매를 먹어 치우는데,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으니 이번엔 편지를 숨겨버렸다는 점이었다. '열매를 먹는 모습을 편지가 보지 못하면 고자질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실은 드러나고, 노예는 종이의 신성(神性)을 믿게 된다.
'편지의 고자질'이란 상상이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기엔 흥미롭지만, 에코가 보기에 저 텍스트는 몇몇 해석의 가능성을 품는다.
첫 번째 가능성. 이 편지는 '암호'다. 바구니는 군대를, 무화과는 군인, 즉 원군(援軍)을 청하는 텍스트로 읽힐 수 있다.
두 번째 가능성. 무화과는 과일이고 과일은 신의 은총을 뜻하므로, 텍스트는 시(詩)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본다면 세 번째, 네 번째 가능성…. 그 이상도 가능하다. 에코는 쓴다.
"해석의 과정을 통해 기호와 현실은 연결된다. 기호의 대상과 기호의 의미 사이의 협동을 유래하는 작용과 행위가 기호학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모든 텍스트는 무한한 해석이 허용될까. 에코의 결론은 이렇다. 원칙적으로 해석은 무한하지만, 해석과 망상은 종이 한 장 차이라 모든 해석을 정당화할 순 없다. 에코는 이 기준을 '텍스트의 의도'에 따른 것으로 본다.
여기서 에코가 경계를 주문하는 단어가 있으니 '그노시스주의'다. 그노시스주의란 "모든 텍스트엔 숨겨진 비밀이 있다"고 믿은 고대의 한 분파인 그노시스파의 사상이라 한다. 이들은 텍스트의 '겉'은 전부 가짜라고 봤고, 기호로서의 텍스트 너머에서 비의를 발견하려 했다.
에코는 그노시스주의를 완전히 부정적으로만 보진 않았지만, 무한한 해석은 곧 편집증이며, 과잉 해석으로 이어진다고 책에서 말한다.
올바른 해석의 정당화보다 선행돼야 할 과제는 그릇된 해석의 무효화다. 텍스트는 자체적으로 '의도'라 불리는 자기방어 장치를 지닌다. 모든 해석이 텍스트의 이해를 풍요롭게, 또 생산적으로 할 순 있어도 모든 해석이 텍스트의 생산성을 필연적으로 높이는 건 아니다.
인생의 복판에서 만난 한 문장이 생에 파열음을 낼 때가 있다.
'지금 만난 이 문장이 내게 말하려는 바는 무엇인가?'란 의심은 해석 욕망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에코의 논지에 따르면 '말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곰곰이 따져봐야 한다.
말하는 이는 텍스트인가? 저자인가? 아니면 문장에 '거울'처럼 비친 나 자신인가? 삶의 방향을 해석해내려는 욕망은 나 자신의 투사(投射)일 수도 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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