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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1 (목)

    [남궁인의 심야 일지] 생사의 고비에서 놓쳐버린 ‘유일한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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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폭설이 내렸다. 병원 근처에서 승합차가 미끄러져 사람을 쳤다고 했다. 곧 카트에 실린 노년의 남성이 일상복 차림으로 응급실에 들어왔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손길이 그를 중환 구역 침대로 옮겼다. 우선 그의 왼쪽 다리가 비틀어진 모양이 보였다. 의료진은 바이탈을 측정하고 모니터를 부착하면서 옷가지를 제거하느라 분주했다. 동시에 나는 그의 부상을 확인했다. 그의 흉부가 왼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었다. 그의 왼쪽 골반도 약간 뭉툭했다. 아찔했다. 육안으로 관찰될 정도면 심각한 외상이었다. 다급한 마음에 환자를 소리쳐 불렀다. “여기가 어딥니까?” “병원이요.”

    그는 의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흉부와 골반에는 큰 손상을 입었지만 목 위에는 외상의 흔적이 없었다. 승합차와 충돌하면서 머리는 피한 듯했다. 통증에도 그는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우회전 차량이 미끄러졌어요.” 그는 주민등록번호까지 정확하게 불렀다. 여든둘의 나이였지만 평소 건강했던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가 의식을 언제까지 지탱할지 알 수 없었다.

    곧 내 키만 한 포터블 엑스레이가 중환 구역으로 들어왔다. 나는 옆에서 실시간으로 결과를 확인했다. 예상대로 갈비뼈와 골반의 다발성 골절이었다. 탄식이 나왔다. 나이를 감안했을 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살아나기 어려운 정도였다. 금방이라도 생사의 고비가 올 것 같았다.

    “수혈관부터 삽입하고 산소 마스크를 최대한으로 적용합니다. 적혈구를 4파인트 신청해주세요. 가온 수액은 2리터까지 투입합니다. 의식을 모니터링하기 위해 삽관은 준비만 하겠습니다.”

    장갑을 바꾸어 끼고 있는데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아들이 소식을 듣고 도착했다고 했다. 나는 신속하게 오른쪽 어깨에 수혈용 관을 넣었고, 다른 의료진은 틀어진 다리를 맞췄다. 환자는 말없이 마스크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흉관이 준비될 때까지 찰나의 여유가 있었다. 나는 가운을 벗어던지고 구역을 나와 비틀거리는 아들에게 상태를 설명했다. 그는 울면서 간청했다.

    “아버지 얼굴을 한 번 볼 수 있나요? 지금 의식이 있으시다면서요.”

    “안 됩니다. 중증 외상 환자입니다. 중환자 구역이라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나를 따라오려는 듯했지만, 실제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대신 닫힌 자동문 너머로 그가 문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마음이 다급했다. 환자가 살아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가능성을 붙들어야 했다. “피는 멀었나요?” “곧 준비된다고 합니다.” 나는 그의 왼쪽 흉부에 흉관을 삽입했다. 중환자 구역은 피투성이였다. 환자는 아직 의식이 있었지만 맥박이 빠르고 혈압이 점차 낮아졌다.

    이제 CT를 찍어야 했다. 출혈이 어디인지 알지 못하면 수술도 불가능했다. 적어도 검사를 받을 정도로 혈압이 유지되어야만 생존이 가능했다. 혈액이 도착하자 나는 피주머니를 움켜쥐고 짰다. 문득 환자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내원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기도 삽관하겠습니다.” 인공호흡기를 달았지만 혈압이 지나치게 낮았다. 예감했던 운명이었다. 의식을 유지한 채 병원까지 도착한 것이 기적이었다. 결국 환자의 심장은 멈추고 말았다.

    자동문 바깥으로 나가 아들을 불러 상황을 설명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돌아가셨습니다.” 아들은 환자에게 다가가 외쳤다. “아버지. 아버지... 무슨 말씀이라도.” 환자는 드디어 눈을 감은 채 아들과 재회했다. 그동안 그들 사이에는 자동문 하나만이 가로막고 있었다. 나는 마스크로 지친 숨을 내뱉으며, 문득, 찰나의 순간에 대해 생각했다. 과연 환자가 가장 원했던 일이 무엇이었을까. 생사의 실낱같은 가능성을 붙잡는 행위는 오히려 내 욕심이 아니었을까. 기적처럼 의식이 남아 있었다면, 단지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보고 싶지는 않았을까.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상 그들에게 유일한 기적이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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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궁인 이대 목동병원 응급의학과 교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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