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성룡 (재)글로벌청년창업가재단 상임이사(CFP) |
세상에는 참 신기하게도 결이 완전히 다른 두 부류의 사람들이 공존합니다.
세상을 놀이터처럼 보는 '해맑은 사람들'. 이들은 천성적으로 낙천적입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다 잘 될 거야”라며 웃어넘깁니다. 이들의 순수함은 주변을 밝게 만들지만, 때로는 그 투명함이 독이 됩니다. 상대방의 복잡한 속내를 읽지 못하고 무심코 던진 돌멩이 같은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가슴에는 바위처럼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흔히 말하는 '눈치 없는 사람'이 되는 순간입니다.
반대편에는 마음의 결이 겹겹이 쌓인 페이스트리 같은 '섬세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이든 어른이든, 이들의 내면은 깊고 복잡합니다. 타인의 표정, 공기의 흐름, 말줄임표 속에 숨겨진 의도까지 감각적으로 인지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주 아픕니다. 해맑은 사람이 무심코 던진 말에 상처를 입지만, 그 자리에서 “나 아파”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관계가 깨질까 두려워 속으로만 삼키고, 뒤늦게 다른 곳에서 “그 사람 참 무례하더라”며 끙끙 앓습니다.
이 두 사람이 만나면 필연적으로 사건이 터집니다. 1번은 악의가 없었고, 2번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딱 한 번만 더, “네 말이 나에게는 상처였어” “방금 말, 혹시 불편했어? 아,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어, 미안해”라고 서로의 주파수를 맞추는 짧은 대화가 없어서 관계는 꼬이고 오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납니다.
우리는 흔히 상대방이 내 마음 같지 않아서, 혹은 세상이 너무 복잡해서라고 탓합니다. 하지만 세상이 복잡한 게 아닙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그 간격을 메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만 유지되는 것이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너무 늦게 깨닫기 때문입니다. 이 깨달음을 얻기까지 우리는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합니다. 어쩌면 평생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AI)이 지배한다는 미래, 이른바 '초격차'가 벌어진다는 세상은 좀 다를까요?
관계의 어려움 속에 AI라는 놈(?)이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골치 아픈 인간관계를 피하려 기계와의 소통에 몰두합니다. AI는 내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눈치 없게 굴지도 않으며, 나에게 상처 주지도 않으니까요. 하지만 기억해야 합니다. 로봇은 효율적으로 데이터를 주고받지만, 인간은 비효율적으로 마음을 주고받습니다. 그 비효율적인 시행착오가 우리가 인간임을 증명합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주인공은 거의 기계에 가까운 기억력을 가졌지만, 사람 사이의 결은 결국 현장에서 배웠습니다. 많은 SF 속 로봇·AI도 인간과 시간을 함께 보내며 관계를 학습합니다. 데이터의 세계에서도 사람 사는 냄새는 끝내 현장에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물론 이 과정은 어렵습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함께'보다는 나의 '생존'이 우선인 존재들입니다. 본능을 거스르고 타인을 받아들이는 과정이기에 다툼과 상처는 필연적입니다. 그러니 관계에서 오는 상처를 너무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아, 우리가 또 사람 냄새나게 부대끼고 있구나.”
그 상처마저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면서, 계속해서 '함께' 나아가는 것. AI가 아무리 빨라져도 사람 사이의 온도는 대화로만 맞춰진다는 것. AI 시대에도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가장 인간적인 품격일 것입니다.
함성룡 (재)글로벌청년창업가재단 상임이사(C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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