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에 정해진 세금을 내는 것은 국가에 대한 의무이기 이전에 시민들이 서로 맺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 계약이다. 그러나 여기, 무려 4,300억 원에 달하는 세금을 내지 않고 14년째 버티고 있는 한 사람이 있다. 바로 한국인 선박왕이라고 불리는 시도해운 권혁 회장의 이야기다. 권혁 회장이 안 내고 있는 세금 4,368억 원은 평균적인 납세자 21만 명의 1년치 소득세에 해당한다. 한 개인이 내지 않은 세금을 메꾸기 위해 21만 명이 필요했던 셈이다.
무려 21만 명이 단 한 사람을 떠받쳐야 하는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대한민국의 조세 시스템과 사법 시스템은 어디서 어떻게 구멍이 났을까. 이 거대한 부정의를 그냥 두고만 봐야하는 것일까.
뉴스타파는 오늘부터 시도해운 권혁 회장의 사례를 통해 대한민국의 조세 정의를 되묻는 ‘법 위의 선박왕’ 연속 보도를 시작한다.
① 하루 70억 원 버는데... 세금 4천억 안내고 버텼다
② 14년 소송전...50만분의 1 확률과 줄어든 세금 1,300억 원
③ 자산 · 소득 0원으로 생활? 수십 억 횡령 증거 포착
<법위의 선박왕> 연속 보도 지난 편에서는 한국인 선박왕 권혁 회장이 선박 사업으로 얼마나 많은 돈을 버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서 2011년에 무려 4,368억 원의 세금을 부과받았는지 그 과정을 전했다.
이번 편에서는 14년 동안 이어진 소송전의 전말을 보도한다.
50만분의1 확률 뚫고 14년을 버틴 ‘법의 방패’
2011년 국세청이 권혁 회장에게 부과한 세금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개인 종합소득세 2,899억원이고 둘째는 법인세 1,468억 원이다. 권혁 회장은 각각의 세금에 대해 모두 부과 처분을 취소해달라며 두 개의 소송을 걸었다.
우선 개인종합 소득세 소송부터 살펴보자.
2013년 1심, 2015년 2심 선고가 내려졌지만 2016년 대법원은 이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파기환송은 2심 판단에 법리 적용이나 사실 확인의 오류가 있었다고 대법원이 판단한 뒤 재판을 다시 하라고 2심, 즉 고등 법원에 돌려보내는 것이다.
대법원이 파기 환송을 하는 비율은 그리 높지 않다. 1심과 2심에서 여러 사실 관계와 법리를 꼼꼼히 검토하기 때문이다. 2015년부터 2024년까지 10년 동안 대법원에 올라온 행정 소송 사건은 37,013건이고 이 가운데 파기 환송된 사건은 1,341건이다. 비율로 계산하면 3.6%다.
3.6%의 확률을 뚫고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된 권혁의 개인종합소득세 사건, 파기환송 판결 이듬해인 2017년 고등법원은 파기환송심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판결은 여기서 확정되지 않았다. 권혁 씨가 이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대법원에 다시 상고를 했기 때문이다. (국세청도 재상고를 했다.)
대부분의 경우 판결은 여기서 확정된다. 대법원 입장에서 보면 파기환송 사건이란 ‘고등법원의 판결이 이런 점에서 틀렸으니 그 점을 고쳐 다시 판결하라’고 돌려보낸 사건이다. 따라서 고등법원이 대법원의 판결 취지를 충실히 이행하는 한 별 문제없이 확정되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권혁의 종합 소득세 사건에서 대법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재상고심을 4년이나 끌다가 결국 2021년 다시 파기환송했다. 매우 이례적인 2차 파기 환송 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2차 파기 환송 이후 고등법원은 다시 파기환송심을 했고, 이 파기환송심 결과에 대해 다시 상고가 이루어져 대법원은 세번째 상고심을 했다. 그리고 그 세번째 상고심에서 마침내 대법원은 파기 자판 결정을 내렸다. 파기자판이란 2심 판결은 파기하되 다시 내려보내지는 않고 대법원이 스스로 확정 판결을 내리는 것이다. 이렇게 7번의 재판을 거쳐 마침내 판결이 확정된 것은 2014년 7월, 소송이 시작된 지 13년만이다.
앞에서 밝혔듯, 행정 소송이 파기환송되는 비율은 3.6%다. 같은 사건이 연속으로 파기환송될 확률은 따라서 3.6% 곱하기 3.6%, 즉 0.13%다. 대략 천 건 중 한 건에 해당하는 확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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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심, 2017년 2심 선고가 났고, 대법원은 2021년 파기환송을 했다. 이듬해인 2022년 서울고등법원이 대법원이 알려준 정답대로 파기환송심 판결을 내렸지만 대법원은 2년을 끌다가 이걸 또 파기환송했다. 앞에서 본 0.13% 확률의 2차 파기 환송이다. 현재 서울고등법원에서 2차 파기환송심이 진행 중이다. 2차 파기환송심은 이 사건과 관련한 6번째 재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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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세금 부과 처분과 관련된 행정 소송은 쟁점이 많고 복잡하다. 특히 권혁 회장 사건처럼 역외 탈세 구조가 끼어 있다면 법적 판단은 더 어려워질 수 있다. 그런 면에서 50만 분의 1 확률로 두 사건 모두 2차 파기환송까지 간 것 역시 합리적으로 설명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권혁 회장 사건의 경우 그러한 ‘지연’ 자체가 큰 의미를 갖는다.
세금 1,369억 원을 깎아줬다.
14년의 법적 공방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권혁 회장에게 부과된 4,368억 원의 세금은 조금씩 조금씩 깎여나갔다.
우선 개인종합소득세의 경우 애초에 부과됐던 2,899억 원이 1,948억 원으로 줄었다. 951억 원 깎인 셈이다. 법인세의 경우 1,468억 원에서 1,042억 원으로 줄었다. 426억 원을 깎아준 것이다. 법인세는 3차 파기환송심에서 54억 원 가량 더 줄어들 전망이다. 두 세금을 합쳐보면, 당초 2011년에 부과된 4,368억 원이 2,999억 원으로 줄었다. 법원이 깎아 준 액수는 1,369억 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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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권혁 회장의 사건의 경우 지연 자체가 큰 의미를 갖는다고 했다. 그 의미는 권혁 회장이 세금을 내지 않은 채로 소송을 시작했다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대부분의 탈세, 역외 탈세의 대상자는 세금을 납부하고 시작합니다. 세금이 고지가 되면 납부를 하고 이 세금을 일단 냈지만 이 부분은 금액에 문제가 있다든가 애초에 이거는 안 내도 되는 겁니다 라는 거를 재판으로 싸우는 거예요. 그래서 승소를 하면 승소한 부분만큼을 국가가 이자까지 쳐서 돌려주는 구조입니다. 그런데 이 구도는(권혁 회장의 경우는) 금액도 큰데 내지 않고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면 안 내고 시간이 끌어지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부담이 하나도 없잖아요. 시간만 잘 보내면 되는 거죠. 저는 그 구도가 작동이 되고 있다라고 보는 겁니다.안창용 씨의 말처럼 일반적으로는 세금이 부과되면 부당하게 느껴져도 일단은 그 세금을 내야한다. 일단 내고 나서 그 부당함을 다투는 소송을 하는 것이다. 만약 재판 결과 세금이 부당한 것으로 확정이 되면 그때서야 낸 세금을 돌려받는다. 그런데 권혁 회장은 세금을 전혀 내지 않은 상태로 소송을 시작했다. 권혁 회장만 유독 세금을 내지 않은 채 소송을 진행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 안창용 / 권혁 탈세 최초 제보자, 국민재산되찾기 운동본부 사무국장
추징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개인 소득이 제로로 돼 있거든요. 국내에서는 소득 신고를 하지 않고 있고 국내에 자기가 실제 소유한 법인에 대해서는 자문이라고만 해놓고 그 자문료 같은 경우는 이 돈으로 받기보다는 차량을 제공받는다든지 어떤 그 혜택을 제공받음으로써 실질적으로 자기가 신고해야 될 소득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국내에 자산과 소득이 전혀 없다면서도 지난 14년 동안 권혁 씨는 계속해서 시도 쉬핑의 회장으로 행세하고 있다. 지난해 6월 5일 현대 삼호 조선소에서 있었던 시도 쉬핑 선박 명명식 사진을 보면, 권혁 씨는 당시에도 버젓이 시도 쉬핑의 회장 자격으로 참석을 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서 자신은 세금을 낼 의무도 없고, 국내에 자산도 소득도 없다고 우기고 있는 것이다.
- 최관순 대상중공업 (시도해운 계열사) 전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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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 6월 5일 현대 삼호 조선소에서 열린 시도쉬핑 선박 명명식에 시도쉬핑 회장 자격으로 참석한 권혁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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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 6월 5일 현대 삼호 조선소에서 열린 시도쉬핑 선박 명명식의 안내 전광판. 권혁 씨의 직함이 시도쉬핑 회장으로 표시되어 있다.
권혁 씨는 정말로 국내에 자산이나 소득이 하나도 없을까? 그럴 리가 없다. 국세청은 권혁 회장의 소유로 의심되는 홍콩의 페이퍼 컴퍼니를 찾아냈다. 그 페이퍼 컴퍼니는 국내에 1,000억 원 가량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회사 이름은 멜보 인터내셔널, 등록된 곳은 홍콩이다. 권혁 회장은 이 회사의 소유주가 자신이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 복잡한 구조를 설계했다. 멜보 인터내셔널을 소유한 회사는 바하마에 있는 오로라 멜바 홀딩스라는 페이퍼 컴퍼니다. 오로라 멜바 홀딩스를 지배하는 회사는 역시 바하마에 있는 라이포드 비지니스다. 라이포드 비지니스는 명의 신탁을 통해 실소유자가 누구인지 숨겨놓았다. 명의 신탁 업무를 대행한 법률 회사의 데이터 베이스가 유출되지 않는 이상 실소유자가 드러나지 않는 구조다.
그러나 국세청은 여러 정황을 제시하며 멜보의 실소유주가 권혁 회장이라는 걸 입증했다. 그러면서 권혁 회장에게 부과한 세금에 대해 멜보가 2차 납세 의무를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근거해 멜보 인터내셔널이 소유하고 있는 국내 자회사들의 주식과 자산을 압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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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보 인터내셔널의 2차 납세 의무에 대한 소송은 2014년에 시작됐는데 이 소송 역시 무려 10년 동안 진행된 끝에 지난해, 2024년 9월에야 결론이 났다. 대법원의 결론은 국세청이 멜보에 대해 부과한 2차 납세 의무가 정당하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국세청은 이제야 멜보의 자산을 정당하게 압류해 추징할 수 있게 됐다.
압류 추징해도 턱없이 모자란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정리해보자.
1. 국세청은 2011년 권혁 회장에게 개인 종합 소득세 2899억 원, 관련 법인에 법인세 1,452억 원을 부과했다.
2. 권혁 회장은 소송으로 대응했고, 대법원의 이례적인 2차 파기환송으로 14년 동안 시간을 끌 수 있었다.
3. 이 과정에서 권혁 회장이 내야할 세금은 4,368억 원에서 2,999억 원으로 줄었다.
4. 권혁 회장은 국내에 자산이나 소득이 0원이라고 주장했다.
5. 국세청은 권혁 회장의 국내 자산을 발견해 세금을 추징하려고 했지만 권 회장은 또 소송을 걸었다. 그러나 국세청이 승소해 자산을 압류할 수 있게 됐다.
이제 국세청이 권 회장의 국내 자산을 압류해 추징하기만 하면 모든 일이 끝날 것 같은 수순이다. 하지만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이 압류 대상 자산, 즉 멜보가 가지고 있는 국내 자산의 가액 자체가 900억 원 정도 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국세청은 멜보 말고 또다른 회사, 즉 홍콩에 있는 시도 쉬핑이라는 회사의 국내 자산도 압류했는데, 이 시도 쉬핑의 국내 자산은 약 100억 원 정도다. 따라서 국세청이 압류할 수 있는 자산은 모두 합해서 1,000억 원 정도에 불과하다. 확정된 세금이 3,000억 원 정도라는 걸 감안하면 2,000억 원의 세금은 영영 못받게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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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3편에서는, 국내에 자산과 소득이 0원이라는 권혁 회장이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 것인지, 혹시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회삿돈을 가져다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추적한 결과를 보도한다.
뉴스타파 심인보 inbo@newstap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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