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몸에서 자라는’. ⓒ이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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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가 의아한 날이 많아졌다. 다른 인간으로부터 내가 누구인지 끊임없이 확인받느라. 수정하고, 수정한 나로 얼마간 살아가다, 그 모든 시간을 깨고 결국 다시 원래 얼굴을 되찾아오느라.
내가 아는 장면이 지나간다. 성취라고 부르기엔 작지만 나만 기억하는 결정들. 어디도 남지 않았지만 결정적이었던 골목과 질문들. 그런 건 쉽게 흘리고 세계로 돌아간다. 좋은 것만 빨리 잊어버리는 사람처럼. 어느새 혼날 준비를 마친 사람처럼.
합격과 탈락이 분명한 세계에서 우리는 여러 차례 다시 시작된다. 너무 많이 다시 해서 어디부터 시작이라 부를지, 시작이 의미를 잃진 않았는지 의구해본다.
보이지 않고 잡히는 게 없어서, 쌓은 시간이 무색해져서 우리가 언제나 시작 중이라는 사실을 잊는다. 벼랑에서 언덕을 넘는 순간만큼이나 벼랑에서 또 다른 벼랑으로 향하는 순간도 시작이다.
잘 살고 싶은 마음이 잘 사는 일로 항상 이어지지는 않는다. 깨끗한 출발과 그렇지 않은 출발 또한 같은 몸에서 자란다. 그러니까 썩 깨끗하지 않은 출발을 연습한다. 삐뚤빼뚤 오늘의 출발선을 긋는다.
여기, 여기부터 다시 하는 거야. 남은 트랙을 새 경주처럼 완주하자. 이미 트랙 위에 있으면서 그렇게 읊조린다. 그 운동장은 이미 나의 것이다. 나만 시작할 수 있다. 그 시공간은 내가 불러주길 기다리고 있다.
한 시절이 끝나간다. 그리고 새로 열린다. 여기 오려고 산을 짓고 강을 넘었다. 잡았던 손을 놓기도 했다.
그 용기를 내느라 몸에서 여러 쌍의 폭죽과 침묵이 떨어져 나갔다. 무언가 다시 자랄 것이다. 눈을 천천히 뜬다. 이 앞에 길고 두꺼운 선을 긋는다. 마냥 곧지도 그렇다고 예쁘지도 않은 선을.
세계가 다시 시작하는 사람들이 남겨둔 빗금들로 빼곡하다.
이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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