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로당에 피살 박진경 대령 손자
박철균 예비역 육군 준장 인터뷰
박철균(62) 예비역 육군 준장의 전화기 너머 목소리는 떨렸다. 박 준장은 1948년 제주 4·3 사건 초기 수습을 맡았던 고(故) 박진경(1920~1948) 대령의 손자다. 이재명 대통령이 박 대령의 국가 유공자 지정 취소 검토를 지시한 지난 15일 이후 이틀간은 평생을 군인으로 산 그도 견디기 어려운 듯했다. 박 준장은 본지와 전화 인터뷰에서 “죄 없는 제주도민을 지키려다 암살당한 할아버지를 어떻게 ‘가해자’로 몰 수 있는지 모르겠다”며 “다른 근현대사도 그렇지만 유독 4·3 사건은 역사 왜곡이 심각하다. 이런 역사 왜곡 시도를 바로잡지 못해 대통령의 ‘국가 유공자 취소 검토 지시’ 사태가 발생한 것”이라고 했다. 현재 북한대학원대학 교수로 있는 그는 “할아버지의 유공자 지정이 정말로 취소될까 봐 인터뷰를 하는 것도 한참 고민했다”며 사진 촬영엔 응하지 않았다.
2025년 12월 16일 제주시 연동 산록북로에 위치한 박진경 대령 추모비 옆에 바로 세운 진실 이라는 제목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장경식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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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적으로 역사 비틀어”
국가보훈부는 박 대령이 1950년 받은 을지무공훈장을 근거로 지난달 10일 그를 국가 유공자로 지정했다. 암살당한 지 77년 만이었다. 하지만 고인은 다시 ‘이념 전쟁’의 한복판에 섰다. 제주4·3 단체와 여권에서 반발이 일자 이 대통령은 박 대령에 대한 국가 유공자 지정을 사실상 철회하라는 지시를 내리면서다. 같은 날 제주도는 박 대령 추도비 옆에 암살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듯한 안내판도 세웠다.
이에 대해 박 준장은 “할아버지가 민간인을 상대로 무차별 진압 작전을 벌였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라며 “(일부 세력이) 의도적으로 역사를 비틀고 있다”고 했다.
박 대령은 4·3 사건의 수습 임무를 맡았던 조선경비대(국군의 전신) 9연대장이었다. 남로당은 1948년 5·10 선거와 대한민국 수립을 방해하려는 목적으로 제주에서 무장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 발생 한 달 정도 후인 5월 6일 박 대령은 제주에 부임했다. 부임 한 달여 만인 같은 해 6월 대령 진급 축하 회식을 마치고 숙소에서 잠자던 중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
4·3 단체들은 박 대령이 강경 진압을 한 양민 학살의 주범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 때 나온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4·3 보고서)’를 보면 당시 소대장이었던 채명신(전 주베트남 한국군사령관)은 “박 대령은 폭도들에 대한 토벌보다는 입산한 주민들의 하산에 작전의 중심을 뒀다”고 진술했다. 주민들을 남로당 무장 세력과 떼어놓는 선무(宣撫) 작전에 주력했다는 것이다.
손자 박 준장은 “할아버지가 제주도에 도착했을 당시 남로당 세력은 5·10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민간인들을 산속에 잡아넣고 있었다”며 “당시 산에는 남로당 빨치산들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서 민간인들을 하산시키는 게 중요했다”고 했다. 박 준장은 “할아버지는 ‘공산 폭도 100명을 놓치더라도 무고한 주민이 한 명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주민 보호 지침도 내렸었다”고 했다.
그래픽=김현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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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로당 일당들이 ‘열사’로 둔갑”
박 대령이 제주에 있었던 1948년 5~6월은 4·3사건 초기였다. 같은 해 10월 19일 전남 여수 14연대의 반란으로 불거진 군의 ‘초토화 작전’이 본격화되기 전이었다. 4·3사건 초기엔 남로당의 폭력적 행태가 더 심했다고 한다. 실제로 ‘4·3 보고서’에 따르면 희생자 1만4000여 명 중 남로당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는 1764명(12.6%)으로 조사됐다.
4·3 보고서에 실려 있는 남로당 주도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에는 박 대령 부임 나흘 뒤인 5월 10일 ‘대내 반동의 거두 박진경 연대장 이하 반동 장교들을 숙청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쓰여 있다. 남로당 세포인 문상길 중위의 지휘로 박 대령이 암살된 것이다. 박 준장은 “남로당 지시로 직속 상관을 암살한 남로당 암살범 일당들이 마치 정의를 구현한 ‘열사’로 둔갑했다”며 “이런 ‘의도적 오독(誤讀)’ 때문에 제주도 내 단체들의 여론이 왜곡됐다”고 주장했다.
박 준장은 제주도가 박 대령의 추도비 옆에 마치 ‘암살이 정당했다’는 식의 주장을 담은 안내판을 세운 것과 관련해서도 “사실과 거리가 먼 한쪽 증언만을 담아 비를 세운다는 게 납득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 안내판은 “박 대령은 아버지의 시신을 끌어안고 있던 15세 아이까지 살해한 인물로, 30만 도민을 대상으로 한 무자비한 작전 공격 명령이 암살 동기였다”는 암살범 손순호 하사의 일방적 증언을 담고 있다. 손씨가 박 대령을 암살한 취지를 정당한 저항인 양 서술한 것이다.
이에 대해 박 준장은 “할아버지를 암살한 손 하사는 남로당 세포였다”며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죄인이 범행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 일방적 증언을 안내판에 그대로 인용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했다. 그는 “지방자치단체가 안내판을 세울 거라면 수많은 반대 증언도 함께 포함했어야 한다”고 했다.
◇3대째 군인 “목숨 바칠 각오했다”
박 대령은 직계 자녀 없이 순직했다. 박 대령 사망 당시 만삭이었던 부인은 비보를 접한 뒤 유산했기 때문이다. 유족들이 논의 끝에 박 대령 형의 아들인 박익주씨를 박 대령의 양자로 입적했다. 박 준장은 박익주씨의 아들로 박 대령의 손자가 됐다. 박익주씨도 6·25전쟁 중 임관해 준장으로 예편했고, 박 준장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3대째 군인의 길을 걸었다.
박 준장은 “할아버지가 비극적으로 돌아가셨지만 아버지도, 나도 망설임 없이 군복을 입었다”며 “전쟁이 나면 미련 없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각오로 살았다”고 했다. 그는 “국방부가 특정 단체의 주장이 아닌, 군의 공식 기록과 사실을 바탕으로 유공자 취소 여부를 엄중히 검토해주길 간청한다”고 했다.
☞제주 4·3 사건, 선무(宣撫) 작전
4·3사건: 제주도에서 남로당 무장 폭동이 도화선이 돼 좌익 세력이 집단 소요 사태를 일으키자 정부가 군경을 투입해 진압하는 과정(1948~1954년)에서 무고한 제주도민이 희생당한 사건.
선무 작전: 전시 또는 사회 혼란 상황에서 적·불온 세력의 귀순을 유도하거나 민심을 안정시키는 심리전·선전 활동.
[장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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