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정민, 8년 만에 연극 무대 ‘라이프 오브 파이’
박정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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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가 돌지 않았을 때 내 자신을 보여주는 것을 굉장히 부끄러워했다. 다른 사람인 척 진짜 못 하겠다. 이번에 마음가짐을 조금 바꿨다. 나 빼고 모두 공연에 특화됐기에 그 앞에선 (연기) 못 해도 상관없다는 안도감이랄까. 일단 한 번 해보겠다는 그 발전적인 행동, 신기했다. 내겐 매우 고무적인 사건이다.”
이 남자에게서 ‘수치심’이란 단어는 평생 떼어놓을 수 없는 족쇄 같은 것이었다. 자신에 대해 지독히도 냉정하고, 곧은 잣대를 갖다 대기 때문일 것이다. 중학생 때 우연히 만난 극단 차이무 단원들의 모습에 반해 연기자의 꿈을 어렴풋이 꿨던 소년은, 그때의 ‘선택’을 덜 자책하기 위해 ‘부끄러움’과 동거를 택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 GS센터에서 지난 2일부터 선보이고 있는 라이브 온 스테이지(연극) ‘라이프 오브 파이’의 주인공 파이 역으로 8년 만에 연극 무대에 선 배우 박정민은 18일 만난 자리에서 ‘부끄러움’이란 단어를 일곱 번 반복하면서, 한참 숨을 고르더니 “앞으로는 조금 덜 부끄러워해 볼까 합니다”라고 슬며시 웃었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얀 마텔의 베스트셀러 ‘파이 이야기’, 이안 감독의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무대로 확장시킨 작품이다.
지난 19일 KBS홀에서 열린 청룡영화제 시상식 무대에서 화사와 박정민이 함께 축하공연을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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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미소였다. 덤덤한 듯 뚱한 표정과, 수줍은 듯 단호한 입매, 그리고 무언가 아련한 웃음이 복잡하게 교차하며 만들어낸 그의 표정. 불과 한 달 전,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얼굴)·조연상(하얼빈) 후보에 오른 것과 동시에 가수 화사와 선보인 퍼포먼스로 수많은 팬이 밤을 새우며 그 장면만 반복 재생하며 ‘박정민 앓이’를 하게 만들었던 그 모습이었다.
이번 연극 역시 매진 행렬. 무대 위 박정민은 팬을 매혹시켰지만, 무대는 그에게 내면의 ‘부끄러움’과 사투하는 사각의 링이었다. 연극 속 파이가 태평양 한가운데서 구명보트에 올라 생존 본능으로 버텨내듯 말이다.
화제의 중심에 선 것에 대한 부담 역시 그에겐 적지 않았다. 박정민은 “8년 전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무대에 설 때 무대의 문이 열리지 않기를 수없이 바랐었다”면서 “이번에도 두렵고 불안한 감정의 파고가 밀려들었지만, 이번 작품을 통해 내 자신을 믿는 법을 배운 것 같다”고 말했다.
박정민의 이름을 대중에 확실히 각인시킨 건 2016년 영화 ‘동주’에서 송몽규를 연기하면서. 청룡영화상 신인상 등 그해 대부분 영화상 신인상을 휩쓸었다. 이후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2020)로 트랜스젠더 캐릭터를 완벽히 소화하며 이듬해 청룡영화상(2021년)에서 남우조연상을 받는 등 박정민은 ‘연기파’ 배우를 거론하는 데 빠지지 않는 이름이었다.
문화/피플/박정민/라이프 오브 파이 - 연습 현장 박정민./제공_ 에스앤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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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오디션을 통해 이 작품에 합류했다. 배우이자 감독, 작가, 출판업자, 유튜버로 다양한 활동을 하는 그에게 맨부커상을 받은 원작 소설에, 아카데미상을 받은 영화 버전, 토니상을 받은 연극의 한국 초연은 어쩌면 비껴갈 수 없는 운명이었을 것이다. 오디션에선 영국인 연출가 앞에서 무려 1시간 반을 연기했다. 대사 연기는 바로 통과. 극 중 가장 큰 축을 차지하는, 퍼펫티어(인형을 움직이는 배우)와의 교감 연기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제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답이 없는 것’입니다. 만지든 뭘 하든 아무거나 하라시는데, 뭘 해야 하는지, 왜 하는지도 모르겠는 거예요.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어느 순간 퍼펫티어가 제 말을 들어주는 순간, 눈물이 왈칵 나는 겁니다.” 이전엔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고 했다. 적어도 그에게 수치심과 두려움의 반대는 ‘신뢰’였다. 오디션을 보라는 얘기에 툴툴댔다던 그는 “그런 행복이 없었다”고 말했다.
라이프 오브 파이 연습 현장. 호랑이 리처드 파커를 앞에 둔 박정민의 얼굴. 그는 원래 "카메라가 없는 곳에서는 리허설이든 대본 연습이든 부끄러워했지만, 이번 작품을 통해 조금 달라지려 한다"고 말했다./제공_ 에스앤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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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가 227일 동안 함께 표류하는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는 두려움이란 존재이자 인간의 생존 욕구, 잔혹성, 희망, 투쟁 그 모든 것을 담고 있다. 파이 그 자신을 상징하기도 한다. 박정민은 “마지막 즈음 파이가 리처드 파커에게 말하는 ‘너를 온전히 사랑해’라는 대사를 정말 좋아한다”면서 “내 자신에게, 또 파커를 연기하는 배우들에게, 또 많은 이에게 진심으로 전하는 말”이라고 말했다.
박정민은 대본을 지독하게 연구하는 배우로 소문나 있다. 읽고 또 읽고 수없이 고치고, 감독과 상의해 다져진 글자로 빽빽이 박혀 있는 박정민의 대본 사진은 ‘노력하는 천재’라는 박정민을 설명하는 도구로 소문나 있었다.
하지만 연극은 영화와 다른 매체. 박정민은 이번 작품 희곡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희곡이라는 것은 나쁘게 말하면 불친절하고. 좋게 말하면 배우가 채울 것이 많아요. 이번 ‘라이프 오브 파이’는 (배우가) 채울 것이 굉장히 많은 대본이었어요. 단번에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대본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본에서 이 파이의 마음까지, 이 마음까지 들어가는 여정이 좀 오래 걸렸어요. 계속 타자로 파이를 생각했던 기간이 길었던 것 같습니다.”
박정민은 기자의 질문을 곱씹으며, 말하는 중 생각을 정리하며 이야기를 늘려갔다. 두 가지 내용이 담긴 질문은 "첫번째, 두번째"라고 말하는 등 자신의 이야기가 제대로 전달되는 지 애썼고, '신념'과 '믿음'이라는 진지한 주제를 이야기하면서도 "(극중 17세) 소년 연기를 하다가 아저씨 특유의 느낌이 자꾸 나와 주변에서 말렸다" "저의 잘생김이요? 관객분들이 보실 수가 없었을 텐데"라는 둥의 특유의 유머를 구사했다./ 제공 샘컴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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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민은 스스로 “고집이 없는 배우”라고 강조했던 이였다. 대본을 다 외우고도 현장에서 다시 고쳐 보며 감독(연출)의 의도를 구현해내려 애써 각종 매체를 통해 “고집이 별로 없는 게 재능”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달랐다. 파이가 이야기해 주는 두 가지 이야기 버전에 대해 그동안 책과 영화를 통해 굳어진 자신의 의견이 강했던 편이었다.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박정민과 퍼펫티어 박재춘 외 모습(에스앤코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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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민은 “‘라이프 오브 파이’는 삶이 갖는 모든 형태를 반영하면서 ‘믿음’이란 게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원작에 등장하는 종교적 이야기뿐만 아니라, 인간 박정민에게 ‘믿음’과 ‘신뢰’는 자신을 한계 짓는 벽을 무너뜨리고 타인에게 의존해도 된다는 ‘연기적 허용’을 허락한 일종의 ‘기도문’이었다.
박정민은 과거 집필한 글에서 ‘옆집 남자’라고 자신을 표현하는 등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 연기를 가장 잘하는 이로 소문나 있지만, 실제로 만나 보니 “현실에 존재하기 어려운”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미 ‘스타’라는 별 중의 별이지만, 그는 자신에게 나태하지 않으려 오늘도 대본을 또 읽고, 상대에 몸을 맡기고, 연출과 대화한다. 연극 속에 등장하는 대사인 “두려움이라는 어둠에서 벗어나려면 언어의 빛을 계속 비춰줘야 한다”는 것처럼.
'라이프 오브 파이'의 배우 박정민은 "명대사를 꼽아달라"는 말에 그의 여정을 함께한 호랑이 리처드 파커에게 마지막 즈음 "너를 온전히 사랑해"라고 말하는 대사를 특히 좋아한다고 말했다. 극 중 리처드 파커는 파이에게 한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의지하다가 챙기기까지 하는 모습이 연출된다. /에스앤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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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민에게 물었다. ‘라이프 오브 박정민’은 무엇인가. “하루하루 생존입니다. 잘 살려고.” 최근에 쓴 산문에서 ‘모두를 만족시키겠다는 불가능의 벽에 또 부딪히고 거듭 좌절하고 다시 일어날 것’이라 말한 박정민은 연극이라는 사각의 링을 박정민식 ‘극복기’로 다시 채워나가고 있었다.
[최보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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